스위스 여성 징병 반대, 국방과 젠더 평등의 새로운 담론을 열다
스위스에서 ‘여성 징병’ 도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84%가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적으로 ‘국방의무’와 ‘젠더 평등’이라는 복합적인 사회적 가치가 어떻게 충돌하고 조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 사안의 핵심은 단순히 여성의 병역 의무 회피가 아니라, 직장과 사회 내에서 아직 달성되지 않은 성평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국가 안보라는 보편적 가치와 개인의 평등권이라는 기본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현대 사회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준다.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중립국이지만, 상비군과 예비군 제도를 통해 자국 방위력을 유지하는 국가다. 남성 의무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여성은 자원입대가 가능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병력 자원 확보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여성 징병제 도입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대다수 스위스 여성들은 군 복무 이전에 사회 내에 만연한 구조적 불평등, 예를 들어 임금 격차, 경력 단절, 고위직 대표성 부족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등한 책임에는 동등한 권리가 따른다’는 원칙을 역설적으로 적용하여,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무만을 부과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 아니라는 시각이다. 나아가, 여성의 군 복무가 오히려 기존의 불평등을 가리거나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여성들이 육아, 돌봄 등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영역에서 기여하는 바를 군 복무와 동등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이 논의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이러한 스위스의 사례는 전 세계적인 젠더 평등과 국방의무 논의의 맥락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이미 여성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들, 그리고 논의 중인 국가들의 상황은 다양하다. 이스라엘은 안보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남녀 모두에게 징병 의무를 부과하고 있으며,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병력 자원 감소와 젠더 평등 이념 실현이라는 두 가지 목표 아래 ‘젠더 중립적 징병’을 도입했다. 이들 국가에서 여성 징병은 군 내 문화 개선과 성평등 의식 제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동시에 군대 내 성폭력 문제나 여성 인력의 활용 방식 등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저출산으로 인한 병력 자원 감소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공정성’ 담론과 ‘국방의무’ 담론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여성 징병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남성에게만 부과되는 병역 의무가 ‘역차별’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성별에 관계없이 국방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스위스 사례와 유사하게, 군대 내 성폭력 문제 해결, 군 복무 이후의 사회적 보상, 그리고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 등 사회 전반의 젠더 불평등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반론에 직면한다. 독일과 같은 모병제 국가에서도 인구 감소로 인해 징병제 재도입 논의가 일면서, 여성 징병제가 해법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러한 국제적 동향을 종합적으로 볼 때, 여성 징병제 논의는 단순히 병력 확보의 문제를 넘어선 광범위한 사회 구조 개혁의 요구로 확장되어야 한다. 과연 군 복무가 젠더 평등을 달성하는 궁극적인 해법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 내에서 기존의 성차별적 문화나 유리천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에게 의무만을 부과하는 것은 진정한 평등이 아닐 수 있다. 또한, 군사 안보 외에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다양한 영역, 즉 육아, 돌봄, 교육, 의료 등에서의 여성 기여를 어떻게 국가적 차원에서 평가하고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남성에게만 국한된 ‘국방 의무’를 넘어선 ‘국가 기여’의 확장된 개념을 통해 시민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정책적 관점에서 볼 때, 정부는 병역 제도의 본질적 의미를 재정의하고 시대적 요구에 맞게 유연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국방력 강화는 단순히 인력 충원을 넘어, 기술 집약적 군사력 강화, 병사 개개인의 전문성 제고, 그리고 군 복무 환경 개선 등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 달성되어야 한다. 동시에, 진정한 젠더 평등은 군 복무 여부를 넘어선 더 넓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제도적 개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직장 내 성차별 철폐,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 확립, 보육 및 돌봄 책임의 사회화, 여성의 정치·경제적 대표성 확대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의 노력이 병행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지속 가능한 국방력과 성숙한 젠더 평등 사회를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위스의 여성 징병 반대 여론은 전 세계가 직면한 젠더, 안보, 그리고 사회적 책임이라는 복합적 과제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문제의 본질은 누가 총을 들고 국가를 수호할 것인가의 단편적인 질문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모두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며, 각자의 능력과 역할에 따라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국방의무에 대한 논의는 사회 전반의 평등 구조를 재설계하고, 모든 시민이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준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 김도현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