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기연구원의 워라밸 성과, 대한민국 사회 혁신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
한국전기연구원(KERI)이 ‘2025 대한민국 일·생활 균형 우수기업’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급변하는 노동 시장과 사회 전반의 변화 속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단순히 한 기관의 영예를 넘어,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장시간 노동 관행과 저출산 문제, 그리고 생산성 저하라는 복합적인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
우선, 한국 사회에서 ‘일·생활 균형’(워라밸)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과 직결된 화두가 되었습니다. OECD 최상위권의 장시간 노동 국가라는 오명은 개인의 삶의 질 저하는 물론, 기업의 혁신 동력 상실과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해왔습니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인력들은 ‘번아웃’과 ‘워라밸’을 극명하게 대비하며, 단순히 높은 임금보다는 예측 가능한 삶과 개인의 성장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러한 인재들에게 매력적인 직장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기업은 우수 인재 유출과 구인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KERI의 사례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선제적인 응답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기사에서 구체적인 제도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수기업’ 선정이라는 타이틀은 유연근무제 확대, 육아 휴직 및 복직 지원, 심리 상담 프로그램 운영,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눈치 보지 않고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조직 문화’ 조성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단기적인 비용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직원의 몰입도와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이직률을 낮춰 인재 확보 및 유지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곧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투자이자 미래 경쟁력 확보의 핵심 요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KERI와 같은 ‘우수기업’의 등장이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여전히 많은 기업은 ‘주 52시간제’와 같은 법적 최소한의 의무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거나, 제도를 운영하더라도 실질적인 활용은 제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경영진의 의지 부족, 성과 중심의 경직된 조직 문화, 그리고 ‘우리만 유연하게 일하면 뒤처진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워라밸 문화 확산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해외 선진 사례를 살펴보면, 일·생활 균형은 단순히 복지 차원을 넘어 기업 경쟁력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유연하고 짧은 근무 시간에도 불구하고 높은 노동 생산성을 자랑하며, 이는 효율적인 업무 방식과 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문화가 결합된 결과입니다. 독일의 ‘인생 계정(Life-time account)’이나 네덜란드의 ‘시간은행’과 같은 제도는 근로자가 생애 주기에 맞춰 근무 시간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하여 경력 단절 없이 지속적인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 기업들이 참고할 만한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전기연구원의 성공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첫째, 기관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지속적인 관심이 필수적입니다. 문화는 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제도적 뒷받침과 함께 이를 뒷받침하는 조직 문화의 변화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활용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셋째, 워라밸은 특정 부서나 계층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 구성원의 인식이 함께 바뀌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중간 관리자의 역할이 특히 중요합니다. 이들이 변화의 ‘허리’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만 조직 전체에 새로운 문화가 안착될 수 있습니다.
정부 역시 ‘일·생활 균형’ 문화 확산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캠페인에 그치지 않고, 우수 기업에 대한 실질적인 인센티브 강화, 컨설팅 지원 확대, 그리고 특히 중소기업이 제도를 도입하고 안착시키는 데 필요한 재정적,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유연근무 제도 확대를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을 더욱 견고히 하고, ‘워라밸 지수’와 같은 평가 시스템을 통해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전기연구원의 ‘2025 대한민국 일·생활 균형 우수기업’ 선정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청사진과 같습니다. 단순히 ‘워라밸’이 좋은 직장을 넘어, 개인이 존중받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며, 나아가 국가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동력임을 인지해야 합니다. 이제는 KERI와 같은 선도적 사례가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이 될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 그리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노력하고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오래 일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그리고 행복하게 일하는 것’이 새로운 미덕이 되는 사회를 향한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 김현우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