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칭 시대를 항해하는 한국 경제: 지표로 본 재편과 전략적 대응
세계 경제가 ‘비대칭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분석은 더 이상 낯선 주장이 아니다. 아시아경제 보도와 같이,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과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심화는 과거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초국가적 경제 질서의 종언을 고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안보와 회복탄력성을 우선하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의 확립을 의미한다.
최근 발표된 세계무역기구(WTO)의 ‘2024년 세계 무역 통계 및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상품 무역 성장률은 2.6%로 전년 대비 소폭 증가했으나, 이는 팬데믹 이전 5개년(2015-2019) 평균 성장률인 4.5%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특히 지정학적 긴장 고조와 주요국들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 기조 강화로 인해 글로벌 외국인직접투자(FDI) 흐름은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글로벌 FDI 유치 상위 10개국 내에서 역내 투자 비중이 2010년 40%대에서 2023년 50% 중반으로 상승하며 지역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는 기업들이 생산 거점을 핵심 시장과 인접한 지역으로 옮기거나, 동맹국 내에서 재배치하는 ‘니어쇼어링(near-shoring)’ 및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지표들은 세계 경제가 과거 ‘규모의 경제’와 ‘글로벌 분업화’를 핵심 가치로 삼았던 대칭적 성장 모델에서 벗어나, 안보와 회복탄력성을 우선하는 ‘비대칭적 재편’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핵심광물, 바이오 등 전략 산업 분야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CHIPS Act) 등을 통해 자국 내 투자를 유도하고, 유럽연합(EU)이 핵심원자재법(CRMA)을 통해 역내 공급망 강화를 꾀하는 것은 단순한 보호무역을 넘어선 ‘경제 안보’ 관점의 전략적 접근이다. 이는 과거 시장 논리에만 맡겨두었던 기업들의 투자 결정이 이제는 각국 정부의 정책적 인센티브와 지정학적 고려사항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다.
국내 주요 기업들의 행보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감지된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 건설을 통해 미국 시장과 공급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2024년까지 총 17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은 이러한 전략적 판단의 단면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는 조지아주에 55억 달러를 투자해 연간 30만 대 규모의 전기차 전용 공장을 건설하며 현지 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미국에 GM, 혼다 등과 다수의 합작법인(JV)을 설립하며 북미 시장 대응과 동시에 공급망 안정화를 꾀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전략은 단순히 생산 기지 다변화를 넘어, 주요 소비 시장 내에서 ‘경제적 국적’을 확보하고 정책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복합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과거 중국 중심의 생산 기지 전략에서 벗어나 북미, 유럽, 동남아 등으로 생산 거점을 확대하는 것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중도 보수적 전략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역내 무역협정의 중요성 역시 재부각되고 있다.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 블록은 공급망, 청정에너지, 디지털 경제 등 특정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조하며 동맹국 간 연대를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다자간 무역 체제가 약화되고, 유사 이념 및 안보를 공유하는 국가들 간의 ‘친구에게만’ 무역(friend-shoring)이 확산되는 흐름을 반영한다. 이러한 블록 경제화는 한국과 같이 특정 동맹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는 안정적인 교역 환경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블록 외부 국가와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하는 과제를 안겨준다.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복합적이다. 고도로 글로벌화된 한국 산업은 공급망 불안정성 심화와 특정 국가의 경제 블록화에 취약할 수 있다. 특히 반도체,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특정 원자재나 부품에 대한 높은 해외 의존도는 잠재적인 리스크 요인이다. 2023년 한국무역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국 중간재 수입 의존도는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미·중 갈등 심화 시 상당한 파고를 겪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핵심 기술력과 고부가가치 산업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급망 내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기회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 제조 장비, 첨단 소재, 배터리 기술 등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십을 구축하려는 주요국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이러한 ‘비대칭 시대’에 한국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모두의 전략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이 필수적이다. 첫째, 정부는 특정 국가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가진 핵심 품목의 공급망 다변화 로드맵을 구체화하고, 이를 위한 기업들의 해외 투자 및 기술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유사 입장국과의 경제 안보 협력을 강화하고, 다자간 무역 체제의 복원을 위한 외교적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경제 안보 태스크포스(TF)’ 등을 통해 국내외 경제 동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발생 가능한 리스크에 대한 시나리오별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기업들은 글로벌 생산 및 판매 네트워크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단순히 비용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삼던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지정학적 위험, 각국 정부의 인센티브, 공급망 회복탄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전략적 분산’ 투자가 필요하다. 이는 R&D 거점의 해외 분산, 생산 기지의 현지화, 그리고 새로운 기술 표준과 규제에 대한 빠른 적응 능력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꾸준한 연구 개발 투자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어떤 외부 환경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근본적인 대응책이 될 것이다.
셋째, 국내 산업 생태계의 기초 체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첨단 산업 분야의 인력 양성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기술 혁신 투자 확대, 그리고 중소·중견기업의 글로벌 공급망 진출을 돕는 정책적 지원은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 확보의 핵심이다. 이는 특정 국가의 정책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체적인 경제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근본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특히, 규제 완화와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결론적으로 세계 경제는 과거의 익숙한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규칙이 정립되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은 자국의 안보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비대칭적 접근을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이러한 흐름을 정확히 읽고, 데이터에 기반한 치밀한 분석과 예측을 통해 정부와 기업이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나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안정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이 비대칭 시대의 핵심 과제다.
— 박서영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