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피 이후의 숙제: AI 슈퍼사이클이 만든 사상 최고, 지속 가능한 코리아 랠리의 조건

코스피가 ‘사천피’를 찍고 국내 주식 시가총액이 3000조원을 훌쩍 넘어섰다는 사실은 단순한 숫자의 축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생산 구조가 반도체 초과이익을 매개로 다시 세계 가치사슬의 상단으로 기어올랐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대외 의존도가 높은 경제가 자본시장을 전략자산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기록은 역사에 남지만, 지속 가능성은 제도·지정학·실물의 합으로만 확보된다. 축포 뒤에 남는 것은 과제다.

이번 랠리의 일차 원동력은 AI 슈퍼사이클이다. 연산 수요의 폭증은 HBM과 고대역폭 메모리 생태계를 한국의 핵심 수출 품목으로 재정의했다. SK하이닉스가 메모리 사이클의 최전선에서 ‘용량·속도·전력’ 세 축을 선점했고, 삼성전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패키징 결합 경쟁력으로 밸류체인 상위로 재진입하고 있다. 미국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증설과 글로벌 반도체 설비투자 재개가 주문의 가시성을 높였고, 메모리 단가의 우상향은 한국의 교역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했다.

외부 환경도 순풍으로 작용했다. 달러 강세가 둔화될 것이란 기대는 신흥국 위험자산에 대한 리스크 프리미엄을 낮췄고, 에너지 가격 변동성은 지정학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국내 물가·금리 경로를 위협할 정도로 확대되지 않았다. 홍해 항로 불확실성이나 해상운임 재상승 같은 잡음에도, 반도체 ASP 상승이 운임·원자재 비용을 상쇄하며 수출 회복을 견인했다. 외환시장 제도 개선으로 해외 참가자의 접근성이 좋아진 점도 외국인 현·선물 쌍방향 유동성을 강화했다.

정책의 공백을 메운 것도 사실이다.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프로그램은 배당·자사주 소각·지배구조 개선을 촉발하는 촉매였다. 강한 비판이 따랐던 공매도 전면 금지는 단기적으로 개인의 위험선호를 끌어올려 지수 레벨업에 기여했다. 다만 시장 미시구조 왜곡과 헤지 기능 약화라는 비용도 누적됐다. 결국 공정한 차입·거래 인프라와 불법 공매도 실시간 적발 체계를 전제로, 대칭적 규칙 아래 질서 있게 정상화하는 시점이 ‘랠리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된다.

외국인 자금의 귀환은 구조적 의미를 가진다. 한국 증시는 만성적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저평가돼 왔고, 이는 지배구조 리스크와 불안정한 정책 신호에서 기인했다. 배당성향 상향, 현금흐름 중심 경영, 영어 공시 확대 등은 장기 자금을 붙잡는 언어다. MSCI 분류 상향은 당장 어렵지만, 외환시장 접근성·공시·공매도 대칭성의 개선은 ‘업그레이드 트랙’에 올라타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글로벌 패시브·액티브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제도는 단기 부양책보다 훨씬 비용 대비 효과가 크다.

비교의 거울은 일본과 대만이다. 일본은 인플레 회귀·지배구조 개혁·엔화 약세의 삼각편대로 30년 잃어버린 시간을 넘어섰다. 대만은 단일 초대형 기업을 축으로 AI 제조허브 위상을 굳혔다. 한국은 메모리 초과이익에 의존한 ‘집중’의 힘으로 레벨업했지만, 산업·종목 편중 리스크는 구조적이다. 반도체 주도 성장은 필연적이지만, 소재·장비·설계·소프트웨어의 동시 확장 없이는 변동성의 하방 베타가 커진다.

금융 여건 변화는 실물의 자금순환을 바꾼다. 고평가 논란 속에서도 자본조달 창구가 다시 열리며 IPO 시장이 온기를 찾고, 성장주·딥테크의 프라이머리 자금 유입이 재개됐다. 거품의 그림자를 경계해야 한다. 원가 없는 자본은 없고, 규제의 빈틈은 결국 개별 투자자의 손실로 귀결된다. 거래소와 감독당국은 상장요건·공시·시장조성의 세 축을 통해 유동성의 ‘질’을 관리해야 한다.

가계 포트폴리오의 이동도 주목된다. 부동산 시장의 둔화와 실질금리 변화는 예금에서 위험자산으로의 재배치를 자극했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역할은 더 정교해져야 한다. 정책 신호에 따른 비가격적 개입이 아니라, 명확한 수익-위험 기준과 의결권 행사 원칙을 통해 ‘시장형’ 장기투자자로 자리매김할 때,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할증으로 바뀔 수 있다.

지정학은 여전히 최종 리스크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은 첨단 메모리·장비 거래의 규칙을 수시로 바꾼다. 중국 데이터센터 수요의 회복이 기대되지만, 수출통제의 경계는 언제든 이동할 수 있다. 중동과 우크라이나 전선, 대만해협·남중국해의 해상안보 변수는 에너지·해운 비용을 통해 기업 마진과 수출가격에 파급된다. 주가에 선반영된 기대수익률과 리스크 프리미엄의 균형이 다시 흔들릴 수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세 가지 경로가 가능하다. 기본 시나리오는 AI 투자 사이클의 완만한 둔화와 정책의 점진적 정상화가 맞물리며 지수 상단이 서서히 높아지는 그림이다. 상향 시나리오는 메모리·파운드리 동시 호황과 밸류업 2.0의 실질 인센티브가 결합될 때 열린다. 하향 시나리오는 미국 금리 경로의 재상향, 지정학적 충격, 공매도 정상화의 미스매치가 유동성 이탈을 촉발하는 경우다. 정책의 할 일은 상·하방 꼬리를 잘라 기본 시나리오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숙제는 명확하다. 첫째, 밸류업을 선언에서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ROE·배당·자사주 정책에 대한 공시 의무와 세제 인센티브를 결합해 ‘좋은 행동’에 보상을, 저성과·저지배구조에는 비용을 매겨야 한다. 둘째, 공매도 제도는 불법에 대한 무관용과 시장조성의 확충을 동시에 구현해야 한다. 셋째, 외환·파생·현물 시장의 동시 개선으로 헤지 비용과 베이시스 왜곡을 줄여 글로벌 자본의 체류 시간을 늘려야 한다.

기업에게도 과제가 있다. AI 사이클의 추세를 ‘체질 개선’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메모리의 수익을 시스템·소프트웨어·에너지 효율로 재투자해야 한다. 공급망 다변화, 해외 규제 대응, 데이터·보안 표준의 선제적 준수는 글로벌 고객의 신뢰를 보증하는 보험이다. 수익의 가시성을 배당·소각·IR로 투명하게 연결할 때, 멀티플 정상화는 한 단계 더 진행될 수 있다.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보다 내구성의 점검이다. 업종·지역 분산, 환헤지 정책, 거버넌스 개선의 진도율을 평가하는 체크리스트를 갖추는가가 수익률을 가른다. 지수는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다. 단기 모멘텀에 편승하되, 규칙 기반 리스크 관리로 변동성의 가격을 지불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천피는 도착점이 아니라 ‘거버넌스 경제’로의 진입선이다. 한국이 지수 레벨을 정책의 성공 척도로 삼는 유혹을 이겨내고, 규칙·투명성·개방성에 베팅한다면 이번 랠리는 ‘일시적 반등’이 아니라 ‘체제의 업그레이드’로 기록될 것이다. 자본시장은 정책을 포장하는 무대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재평가받는 장이다. 이 단순한 진실을 지켰을 때, 다음 기록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 오지훈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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