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독주, 현장의 침묵…한국영화 어디로 가나

강남의 한 멀티플렉스 극장, 저녁 7시를 앞둔 황금 시간. 전관은 외화 포스터로 뒤덮여 있다. ‘퓨리오사’,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시리즈, 그리고 ‘킹덤 오브 더 플래닛 오브 더 에이프스’가 대형 전광판을 장악한다. 플로어 한쪽, 조용히 걸려 있는 국산 영화 포스터엔 관객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다. 매표소 인근에선 미련한 표정의 젊은 커플이 팝콘을 들고, 인기 있는 외화 티켓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극장 내에서 한국영화의 존재감은 사실상 침묵에 가깝다.

이런 현상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2024년 5~6월, 전국 박스오피스 상위 10위권은 외화가 줄줄이 독점했다. 국산 신작은 찾아보기 어렵고, 기존의 기대작마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업계 관계자들은 ‘대작 부재’ 탓을 든다. 하지만 현장 기자의 시선에서, 위기의 본질은 더 그늘지고 복합적이다. 먼저, 자본의 흐름이 급격히 외화 쏠림 현상을 부추긴다. 팬데믹 이후 할리우드 배급사의 적극적 ‘마케팅 재투자’, 이를 정면 돌파하지 못한 국내 투자배급사의 소극성, 그리고 검증 받지 못한 신인 감독의 데뷔가 연쇄적으로 무너진 결과다.

메가박스 동대문, 새벽 영업 준비 현장. 프로젝션 매니저 이 모 씨는 ‘한 때는 한국영화 예매율이 80% 넘었던 날이 있었다’며 턱을 쓸어올린다. 그는 “이제는 관객이 한국영화 개봉일조차 모를 정도”라고 토로했다. 소위 ‘기대작 쏠림’의 악순환도 심각하다. 2024 상반기, ‘탈출: PROJECT SILENCE’ ‘파묘’ 등 블록버스터급 이슈작들이 끝나자, 국내 극장은 다시 한 번 허전한 지도를 보였다. 그 사이 극한의 엔터테인먼트를 내건 외화들이 탄탄한 연출력과 막대한 마케팅 물량을 등에 업고 빈자리를 독점한다.

단순히 숫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실제로 극장 현장에선 영화가 관객을 만나는 첫 장면, ‘현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6월 초, 한 독립상영관을 찾은 관객들은 “한국영화는 포스터만 봐서는 볼 마음이 안 생긴다”며, 시대정신이나 공감코드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업계 내부에선 제작 시스템의 경직화도 짚는다. 기획에서 투자, 후반작업에 이르는 전 단계가 ‘치킨게임’ 심리로 위축되며, 창작 현장의 역동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른바 ‘신작 씨마름’ 현상. 김지운 감독, 봉준호 감독 등 거장들이 새로운 실험을 멈췄고, 신진 감독들은 소규모 OTT로 밀려난다. 2024년 연출 데뷔작 중 1,000만 관객을 이끌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업계에선 이 위기를 두고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실제 취재진이 만난 젊은 영화 인력들은 “외화식 블록버스터를 답습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없다”며, 온전히 현장 경험과 한국 특유의 정서에 기반한 ‘콘텐츠 실험’만이 진짜 해답이라고 강조한다. 최근 ‘하이퍼로컬’ 도시영화나 독립예술영화들이 해외 페스티벌에서 호평을 받는 것도 사뭇 의미심장하다. 배급 구조와 기획 방식 곳곳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영화가 다시 팔짱을 풀고 관객 앞으로 한발 나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장에 서려 있는 ‘침묵’을 깨야 한다. 현장 영상 취재에서 확인되는 것은, 외화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각자의 이야기─나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로 무장한 창작자들의 도전이 절실해 보인다는 점이다. 스크린 독점, 신작 부재, 침묵하는 창작현장. 모든 요소들은 지금 이 순간 새로운 한국영화가 탄생할 토양이 될 수도, 영영 설 자리를 잃는 비극이 될 수도 있다. 극장 한복판, 텅 빈 상영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스피커 소리가 한국영화에 진동한다. 누가 이 긴 침묵을 처음으로 깰 것인가─ 계절은 바뀌고, 카메라 렌즈는 여전히 새로운 현장을 비추고 있다.

— 백하린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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