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불법계엄: 국가위기 속 주권자의 각성과 헌정질서의 시련
1979년 12월 3일, 한국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불법계엄’이 선포되었다. 헌정질서를 유린한 이 사건은 당시 군부의 권력욕과 국가 기구의 불완전한 견제 구조, 사법적 무력함이 교차한 전형적 위기의 표본이었다. 불법계엄 이후 민주주의 체계는 일시적으로 퇴행했으며, 국민의 주권이 국가폭력에 의해 위협받았음을 다시 한 번 환기한다.
계엄령은 국가위기 상황에서 최소한의 사회질서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잠정적으로 발동되는 국가 통치 수단이다. 그러나 1979년의 계엄은 법적 요건을 갖추지 않은 채, 권력의 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당시 최고 통치권자는 대통령 유고 상황에서 군 내 실세들과 함께 일방적으로 계엄을 확대했다. 군 기동부대가 도심을 장악했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무차별적으로 제한되었다. 이 시점을 중심으로 법조계와 사정기관의 대응 무력화가 극명히 드러났다. 당시 대법원은 계엄의 합헌성 여부에 대해 침묵하거나, 권력 집단의 논리에 편승했다. 검찰 역시 정치권력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경찰은 군의 지시에 종속됐다.
사건 타임라인을 보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국가의 감독·감시 시스템은 혼란에 빠졌다. 11월 10일 계엄령이 확대 발표됐고, 12월 3일에는 법적 근거가 취약한 불법계엄령이 실제로 시행됐다. 이후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국가폭력이 발생했다. 당시의 사법·치안 기구는 범죄적 명령에 도구화되어,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와 인권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크다.
당시 주요 언론과 사정기관 담당자들 사이에서조차 “군내 권력자가 헌법 위에 군림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통치체계의 균형성은 무너졌다. 계엄확대와 불법행위에 대해 목소리를 낸 판사, 검사는 극소수였으며, 이들 역시 정치적 탄압에 시달렸다. 1980년대 들어 사법적 책임 소재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졌으나, 법적 심판은 미흡했다. 1990년대 이후 관련자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확대됐지만, 시대의 상처는 오랜 시간 이어졌다. 법조계 원로들은 “국가권력 남용의 본보기”로 이 사건을 지금도 지적하고 있다.
최근 ‘계엄령’ 관련 법령 및 제도 논의가 재점화되고 있다. 2023년에는 박근혜 정부 당시 촛불집회 계엄령 문건 파문이 불거졌고, 2024년에도 사법 절차 내에서 계엄령 발동 관련자의 문책 및 제도 개선 요구가 이어졌다. 사정기관과 사법부의 견제력 강화가 선결 과제로 다시 주목받는다. 현직 검사장 출신 변호사 L씨는 “역사적 사법 실패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위기 때일수록 법치주의의 룰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12.3 계엄령 45주년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기념 학술포럼, 진상규명 촉구 집회가 열렸다. ‘더 이상의 불법계엄은 없다’는 교수·변호사단 연대 결의문도 발표됐다. 시민사회는 ‘국가비상사태 때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재교육, 헌법수호기관의 독립성 제고를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국가는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기본권과 공익 사이 균형을 지켜야 한다. 사법·치안기구의 헌법적 임무, 언론 및 국민의 감시 역할이 모두 부재할 때, 역사적 비극은 반복될 수 있다. 불법계엄 사건은 ‘국가위기시 권력 남용’ 경계의 상징으로 남았으며, 민주적 통제력 확보가 언제나 선행되어야 함을 다시 강조한다. 이 교훈을 망각할 때,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권력 남용과 헌정질서의 붕괴, 무기력한 견제구조는 언제고 재현될 수 있다. 사법·사정기관은 국민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며, 헌법이 명시한 원칙만이 최후의 방패임을 각인해야 한다.
— 김하늘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