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연대, 민주화운동기념관 ‘빛의 연대기 展’이 전하는 삶의 온기
12월의 미약한 햇살 아래, 민주화운동기념관에 들어선 김영수(67·서울 중랑구)는 잠시 기념관 마당에 멈춰 섰다. 40년 전 젊은 날의 그와 친구들은 억압과 두려움 한가운데서 ‘자유’라는 서툰 단어를 외치곤 했다. 오늘 이곳에서 그는, 그날의 기록 앞에서 오래된 아픔과 희망을 다시 마주한다. 민주화운동기념관이 광복 80주년, 그리고 비상계엄 선포 1년을 맞아 기획한 ‘빛의 연대기 展’은 김영수와 같은 시대의 사람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얼마나 일상 속에 스며 있고,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전시장을 찾아서 한참 머물렀던 박효진(31·경기도 성남시) 씨는 노트에 한 문장을 적는다. “내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하루가 누군가에겐 절박한 희망이었구나.” 이번 전시는 과거의 투쟁사를 시간 순으로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의 이야기, 즉 평범한 시민의 일상과 염원, 민주화 투쟁 속 경험과 상처를 담아낸 기록, 사진, 육성 등 다양한 상호작용 매체를 통해 시선을 끌어당긴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계엄 시대의 숨죽인 밤을 연출한 미디어아트. 시민들의 목소리, 현장에 남겨진 사진 속 표정,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 당시의 숨결을 전한다. 이처럼 민주화운동이 곧 ‘개인의 평범한 행복과 건강한 삶’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그 순간의 절박함과 희망이 여전히 오늘의 건강한 복지사회로 이어지고 있음을 전시는 차분하게 보여준다.
비단 민주화운동기념관의 이번 ‘빛의 연대기 展’ 뿐만 아니라, 최근 여러 시민사회 단체와 교육기관에서도 민주주의 가치를 ‘사람 중심’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역사와 관련된 기록물 기증식이 잇따르고, 초등학교 교사 박정은(43) 씨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아이들과 나누려면, 영웅담이 아니라 그 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선택과 고뇌, 행복을 나눠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는 고난과 희생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 서술 대신, 정연히 삶을 살아낸 ‘평범함의 위대함’을 체험하는 프로젝트 수업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한 변화다. 민주화운동의 주체는 VIP나 사회 운동의 리더만이 아니다. 이름 없는 학생, 배달 노동자, 그리고 거리에서 자신만의 소신을 지켰던 이웃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었다는 사실, 곧 건강한 사회와 복지 역시 그런 ‘연대’ 위에 자란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한편, 인권과 민주주의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이들의 아픔과 후유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만난 김성애(58) 씨는 “계엄과 탄압의 시대를 몸으로 겪은 분들이 겪는 정신적·신체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 그리고 이들이 경험하고 살아온 사회적 소외감 해소 역시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라며 복지와 건강이 곧 기억의 실천임을 강조한다. 단순한 과거 서술이 아니라 ‘기억의 건강’, 나아가 사회적 신뢰의 회복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처럼, ‘빛의 연대기 展’은 역사를 관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삶속에서 우리가 이어가야 할 이야기를 묵직하게 건넨다. 살아 있는 동시대의 시민으로, 때론 자녀의 손을 잡고 찾은 학부모로, 때론 조용히 관람을 마치는 노년의 기억으로. 전시장을 찾은 모두의 모습을 바라보며, 민주주의란 거창한 정치 이벤트가 아니란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일상 한켠에 마련된 건강, 복지, 노동, 교육의 자리마다 ‘연대’의 미덕이 새겨진 사회가 바로 내일의 민주주의임을, 이 전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빛으로 말해주고 있다.
역사란 기록이자 치유이고, 무엇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다. 민주화운동 기념관 전시의 따스한 이야기와 촘촘한 자료들이 시민 각자의 일상에 ‘민주주의는 곧 건강과 평화로운 삶’임을 남긴다. 장소를 나서며 다시금 마음에 새겨본다. 가족과 이웃,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의 연대가 민주주의의 첫 마디였음을. — 김민재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