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의 그림자, ‘주술회전’ 너머 우리 영화의 자리 ― 박스오피스가 전하는 온도

‘윗집 사람들’과 ‘정보원’, 이름 안에 적막이 스며든 영화들은 12월 초의 극장가에서 ‘주술회전’을 앞세운 일본 애니메이션의 포성을 여러 날째 견디고 있다. 흥행 뉴스의 헤드라인이 쉴 새 없이 바뀌는 시대, 이 두 편의 국내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각각 3위, 4위에 머무르고 있다. 일본 대형 IP 애니메이션이 국내 시장을 압도하는 기시감, 이는 단순한 시장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감정선을 대변한다. 아마도 영화관에 들어선 관객들의 시선, 그리고 피로와 위로가 중첩된 복합적 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윗집 사람들’은 공포와 코미디 사이 어딘가, 일상과 비일상의 봉합선을 섬세하게 건드린다. 1990년대식 아파트와 그 안의 풍경은 애써 단단하게 만든 울타리가 무너지는 순간의 불안과 희망을 내리그은 색연필 같다. ‘정보원’ 또한 현대사의 뒤안길에서 미묘하게 출렁이는 인간 군상을 좇는다. 첨예한 시대감각과 인물의 내면, 그리고 마주한 현실의 간극—이 영화가 그리는 정보와 권력, 이름 없는 개인의 서사는 거대한 드라마와는 또 다른 결의 묵음을 띤다.

하지만 1위와 2위는 일본 애니메이션 ‘주술회전’과 또 하나의 대작이 지키고 있다. ‘주술회전’의 흥행을 두고 누군가는 “오랜만에 찾은 극장 관객몰이”라며 안도의 눈길을 준다. 그러나 화려한 비주얼, 팬덤 기반의 강고한 IP 파워는, 같은 시기 출격한 국내 영화들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CGV와 롯데시네마 예매율, 웹 검색 트렌드, 그리고 포털 실시간 반응까지. ‘윗집 사람들’과 ‘정보원’은 그 모두에서 ‘주술회전’에 밀렸다. 익숙하고 강렬한 이야기구조, 한국 영화 팬덤의 구조적 약세가 촘촘히 얽혀 있는 셈이다.

콘텐츠 경쟁이 과열될수록, 우리 영화들은 어디쯤 서 있어야 할까. 국내 관객의 눈빛은 예전같지 않다. ‘공조 2’나 ‘범죄도시’ 같은 장르물의 시대는 지났고, 팬데믹 이후 달라진 극장문화가 잠식한 빈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어쩌면 빠르고 다채로운 글로벌 콘텐츠일 수도 있다. 이에 영화산업의 내재적 위기론, ‘한국 영화의 주체성’ 논의가 다시 떠오른다. 매체와 SNS에는 영화관에서 비슷비슷하게 흘러나오는 후일담이 많다. “보고 싶은 게 없다”, “차라리 OTT로 본다.”, “왜 일본 애니만 줄서나.” 이 모든 목소리는 한겨울 밤 거울처럼, 침잠과 방황의 사이에서 우리 영화에 묻는다.

이제 극장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소비 공간이 아니다. 코로나의 그늘 속에서 잊고 있던 공동체적 감정, 소속감, 나란히 앉아 느끼는 온도—그 모든 것을 되찾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윗집 사람들’과 ‘정보원’의 성적은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우리의 이야기를 지키는 힘이 되어야 하는가. 세계적인 콘텐츠 홍수 속, 박스오피스라는 찻잔 속 파도가 실은 세대 간, 취향 간, 그리고 문화 산업 내 선택의 다양성과 미래를 비추고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결국 관객이 답이다.” 정답에 가까운 진실이면서도, 불편한 한계도 담고 있다. 우리 영화계가 일본 대작, 판타지 애니메이션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상상해야 할 타이밍임은 분명하다. 현실의 바로 옆에서, 그러나 분명히 남다른 이야기와 목소리로 스크린을 밝힐 용기. 그리고, 잊힌 영화들, 지나간 이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조용히 건네는 징검다리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거대 IP와 신구 장르의 교섭, 자본의 벽, 그리고 관객의 마음. 이 세 가지 축 위에서, 다시 겨울의 극장가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어쩌면 거의 절망에 가까운 통계의 안쪽에서, 한국 영화의 한기는 더 다급해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극장에 앉아 어둠 속 스크린을 응시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멈출 수 없는 이야기의 욕망과, 진짜 한국영화만이 선사할 수 있는 생의 결, 그 감동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 정다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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