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배우 김지미, 한 시대를 이끈 목소리가 멀리 미국에서 조용히 스러지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12월, 문화계에 조용한 슬픔이 번진다. 이름만으로 한국 영화 황금기의 온기와 빛을 떠올리게 만들던 배우, 김지미가 향년 85세로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목이 먼 이국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팬들에게도, 동료들에게도 깊은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김지미가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7년. 이후 500여 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녀가 만들어낸 수많은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촉촉하면서도 단단하게 빚어낸 감정의 결들이 한국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지옥화』(1958)로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후, 『청춘쌍곡선』(1959), 『별아 내 가슴에』(1968), 『만추』(1966), 『춘향전』(1971), 그리고 『아내들의 행진』에 이르기까지 김지미의 필모그래피는 그 자체로 한국 여배우사의 살아 있는 교본이었다. 그는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연기, 때론 삶을 통째로 껴안은 듯한 거친 숨결, 그 안에 또로록 맺히는 눈물 한 알로 관객의 마음에 여운을 남겼다.

한동안 방송 출연과 공식 석상에서 물러나 미국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마음 따뜻한 선배’로 그리고 일반 대중들에겐 ‘오래 전 스크린 위의 반짝임을 품은 얼굴’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가족 곁에서 차분하고 품위 있게 세상을 떠난 김지미의 삶은, 화려함과 평범함, 고난과 영광이 교차하는 사람의 생애 그 자체였다.

김지미는 한때 한국 영화계의 ‘3김’—신성일, 김지미, 김진규—라는 전설적인 조합의 중심에 있었고, 당대 충무로의 명실상부한 흥행퀸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오드리 햅번에 버금가는 미모’라는 평가를 받아 세계영화제 초청도 종종 받았다. 최근 재조명된 자료와 동시대 영화평을 살피면, 단순한 미모로만 평가받기엔 너무나 절제된 감정, 내면의 진동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기는 자기만의 연기법이 시대를 앞선 것임이 새삼 보인다. 『만추』나 『춘향전』같은 영화에서 부드럽고 담백하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얼굴은 지금까지도 국내외 영화인들에게 영감의 대상이다.

그녀는 화려함 속에 수많은 숱한 고난 또한 겪었다. 1970년대 한국 영화의 침체기, 흥행 위주의 캐스팅, 여러 차례의 사생활 스캔들, 대중의 편견에 시달리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김지미는 조용한 미소와 소탈함, 그리고 품격 있는 태도로 이 모든 소용돌이를 지나왔다.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연기에 담긴 자기 생각을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후배들에게는 늘 “자기 자신을 잃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극적인 순간보다 사소한 일상, 영화 촬영이 끝난 뒤 스태프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더 오래 기억한다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지금의 세대에게는 김지미라는 이름이 낯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영화 100년’, 동아시아 여성배우의 역사 한 가운데 그가 남긴 발자국은 어느 누가 지운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오드리 햅번, 이탈리아에는 소피아 로렌, 그리고 우리에게는 김지미가 있었다. 영화 속 공간을 휘감던 그의 목소리, 여백이 많은 눈빛, 아련한 표정 하나하나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오랜 산책의 흔적처럼 스며든다. 헐벗은 나무 사이 희뿌연 겨울 아침, 다정하고 온유했던 그 얼굴이 잠시 스쳐가는듯 하다.

영화는 세월을 거슬러 흐르고, 배우의 인생 또한 그렇게 이어진다. 우리 곁에서, 혹은 지금은 아주 먼 그곳에서, 김지미가 남긴 따스한 온기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하예린 ([email protected])

원로배우 김지미, 한 시대를 이끈 목소리가 멀리 미국에서 조용히 스러지다”에 대한 5개의 생각

  • tiger_cupiditate

    이 정도면 시대의 아이콘급… 김지미님 영화 한 번도 안 본 사람 없을걸요? ‘만추’는 내 엄마가 인생영화로 꼽던데. 흥행퀸… 은퇴 후는 더 조용했구나. 그저 마음으로 고인을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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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젠 다시 그런 배우 안 나올 듯… 그냥 멋있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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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 대단한 인생… 영화도 그랬고 스캔들도 많았지. 그래도 우리들은 어릴 때 김지미씨 얼굴 못 잊어. 평온하게 떠났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고인의 명복 기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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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ger_tempora

    정말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청춘의 아이콘이자 한국영화계의 한 획을 그으신 분인데,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더 아쉽습니다😢 긴 세월의 무게와 명성을 한 몸에 지고 가신 분, 이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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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거목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한국 문화사 한 페이지가 접히는 기분임…!! 김지미 영화는 클래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엔 다들 잘 안 보더라. 한 번쯤 추억하고, 꼭 다시 만나길 바라. 평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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