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훈의 푸드로드] 변곡점 맞은 고기구이 식문화

무심코 지나치던 연말의 거리, 눈 내린 저녁 공기엔 고소한 고기 불내음이 흩날린다. 유년시절엔 주말이면 어김없이 가족들과 찾았던 삼겹살집이 있었다. 두툼하게 썬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 간장에 푹 적신 양파 한 점, 그리고 시원하게 돌아가는 환풍기까지. 이처럼 고기구이는 누군가에게 식탁 이상의 무엇이었고, 한국인들의 삶 구석구석에 각인됐다. 2025년의 오늘, 우리는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 [문정훈의 푸드로드]는 변해가는 고기구이의 현재와 내일, 그리고 그 속에 깃든 미묘한 온도차를 ‘자리’와 ‘시간’,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섬세하게 짚어낸다.

최근의 고기구이 풍경은 바야흐로 트렌드의 전환점에 와 있다. 한때 삼겹살·한우가 양대 강자였다면, 요즘은 산지에서 직접 공수한 숙성육이 인기다. 드워프처럼 크고 넓은 오픈 테이블 위에 띄운 블랙 앵거스, 고온참숯 앞에서 조심히 노릇하게 익혀내는 숙성 스테이크,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한 한우 ‘오마카세’ 등. 일부 공간은 예술작품 전시장이며, 또다른 곳은 세련된 바를 방불케 한다. 장소와 메뉴, 조리방식까지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 펼쳐진다.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식문화의 본류와 손을 잡고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변모한다. 젊은 세대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가족 단위 손님도 ‘공유식사’ 경험을 찾는다. 불을 마주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극히 일상적인 술잔 높이에 미묘한 온도가 더해진다. 고기구이란 결국 관계와 관계 사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도 같은 것이다.

이처럼 변곡점 한복판에는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다. 우선, 고품질 육류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육류유통학회는 2025년 들어 드라이에이징·숙성육 시장의 성장률이 20%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소비자는 기계적이고 일률적인 고기의 ‘맛’에서 벗어나, 산지의 이야기와 장인정신, 독특한 식감·풍미에 더 큰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에도 불구, 고기 한 점에 투자하는 심리에는 외로움과 위로, 휴식과 경험의 이중주가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1인 구이’ ‘테이블 바’ 등 새로운 공간의 등장은 공간 활용의 혁신이자 사회적 분위기의 반영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증기로 실내를 가득 채우는 스팀로스터, 환한 조명과 적극적인 ‘굽기 도우미’의 서비스, 건강을 강조하는 한돈 저지방 구이, 지역 한우의 로컬테이블화 등 변화의 스펙트럼은 넓고 깊다. ‘맛’이라는 감각이 외부 환경과 경험, 일상의 감정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기구이 매장은 우아하게 증명하고 있다.

프랜차이즈와 소규모 장인의 공존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다. 전국 각지의 숨은 맛집부터 도심 속 럭셔리 한우 전문점, 가정집 1층 작은 연탄구이집, 골목 어귀의 노포까지. 오래된 화로의 불씨는 맥락을 바꾸어가며도 여전히 살아있다. 의외로 손님들은 촌스러운 환풍기, 허름한 파란 플라스틱 의자, 두꺼운 가운 대신 새하얀 손수건에 안도의 숨을 쉬기도 한다. 추억과 내일, 로컬과 글로벌, 대중과 프리미엄이 한 그늘 아래 섞인다. 공간이란 결국 사람의 기억과 감정, 이상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잘 만든 고깃집은 세대와 취향까지 넉넉히 품는다. 20대를 위한 세련된 ‘셀프바’, 40대가 편히 앉아 소주 한잔 쯤 기울일 수 있는 아늑한 테이블, 그리고 어린이의 웃음소리가 묻어나는 가족석까지. 고기구이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 꿈틀거린다.

한편, 식재료·서비스 혁신도 계속된다. 한국식 고기구이에 해외 시리즈나 서양식 기법을 곁들인 가게들 역시 속속 등장한다. 미슐랭 스타 셰프가 큐레이션한 ‘육즙 레스토랑’, 일본식 로바타야키와 프렌치식 ‘플랑베’의 절묘한 조합 등. 디지털 예약, QR 오더, AI 그릴 관리까지 최첨단 서비스가 일상으로 스며든 것도 손쉽게 체감 가능하다. 실제로 올해 서울 시내 신규 오픈한 고기구이점 열 곳 중 일곱 곳이 이 같은 하이브리드나 프리미엄 서비스를 지향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미식은 결국 스토리텔링이자, 삶이라는 커다란 서사의 장면 전환이다. 불판 위에서 환한 미소와 조우하거나,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에 소금을 찍어주는 감정까지. 그 모든 스냅샷이 ‘고기구이’라는 한 단어 안에 축약되어 있다.

고기구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배를 채우는 일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일이다. 아이 손을 꼭 잡고 첫 소주잔을 채워준 아버지의 어깨, 오래전 친구와 소란스러운 저녁을 나누던 기억, 누군가에게는 외로이 지새운 새벽마저도 한 모퉁이 품어준다. 삶의 큰 변곡점엔 언제나 저녁 식탁 한 가운데, 따뜻한 불과 고소한 육향이 머문다. 고기구이 문화는 더이상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섬세하게 다양한 담론과 취향, 그리고 감정의 층위를 받아들이며 진화 중이다. 때론 옅은 연기로, 때론 번지는 웃음소리로 우리 곁에 머무르는 ‘고기구이의 시간’은 여전히 깊고 따스하게 흐른다.

이 겨울 누군가와 함께 앉아,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온기를 오래도록 나누기를 소망한다.

— 하예린 ([email protected])

[문정훈의 푸드로드] 변곡점 맞은 고기구이 식문화”에 대한 5개의 생각

  • 숙성육 ㅋㅋ 먹다보면 결국 값만 오르는 느낌… 근데 고기엔 약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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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고깃집 컨셉 진짜 다양해진 듯ㅋㅋ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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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기구이도 결국은 추억과 현재를 넘나드는 문화의 꽃인 듯🤔 디지털 혁신이 감성까지 바꾸는 시대, 다음엔 어떤 ‘먹는 경험’이 나올까요? 그저 불판 앞에 있으면 세상 걱정 다 잊혀지는 기분, 다들 공감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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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깃집=추억’ 공감하지만 지나친 고급화, 과도한 서비스 경쟁이 정작 현장의 온기를 지울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전통과 현대, 그 균형이 관건이겠죠. 맛과 감정 모두 남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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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고기 먹으러 가도 예약 시스템에 QR코드에 ‘육즙 가이드’까지!! 자꾸 복잡해져서 먹는 재미에 방해되는 거 같은 느낌도 있네요. 그래도 불판 앞에선 다들 평등하다는 사실, 그거 하나로 힘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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