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밀, 옥수수’를 통해 본 식문화 변화상…’탄수화물 연대기’ [전시리뷰]

도시의 박물관 한쪽, 부드러운 조명 아래 펼쳐진 익숙하고도 소박한 풍경. 옅은 노랑빛의 보리, 고운 새하얀 밀, 그리고 투박한 황금빛 옥수수가 눈앞을 채웁니다. 최근 개관한 전시 ‘탄수화물 연대기’에서는 인류와 함께한 곡물, 특히 보리·밀·옥수수라는 세 가지 작물 위에 펼쳐진 우리의 식문화 지형 변화가 차분히, 그러나 생생하게 조명됩니다. 무심히 밥상에 오르내리는 빵조각, 묵직한 옥수수죽 한 그릇, 향긋하게 퍼지는 보리차까지. 이 구체적이면서도 온몸에 닿는 경험들은 인간이 자연과 관계맺으며 생활을 일구어온 오래된 배경이었지요.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고요한 곡물 냄새와 함께 방문객들의 눈길을 붙드는 건 다양한 나라, 시대, 지역의 ‘식탁’ 사진들입니다. 한반도의 보리밥잔치와 유럽의 정결한 밀빵, 남미의 옥수수 토르티야 식탁. 각자의 방식으로 이어져온 삶과 레시피가 고요히 대화를 나눕니다.

보리는 결핍의 시절을 견뎌낸 단단함과도 같았습니다. 가난한 시절 보리밥은 곧 생존의 상징이었고, 봄이면 보리이삭 사이를 가르며 땀 흘리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보리밥 잔치가 열리던 풍경과, 그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따스함이 사진과 영상 속에서 새록새록 재현됩니다. 그 곁에 전시된 해방 후 밀가루의 대중화, 자유무역의 물결을 타고 넘은 미국산 밀의 무게는 또다른 기억을 남깁니다. 전쟁 이후 원조로 쏟아진 밀가루 포대를 활용한 라면·빵·만두·우동의 탄생 스토리, 그리고 빵집 앞을 맴돌던 아이들의 눈망울까지 — 현대 한국 식탁에 밀가루 음식이 차지한 자리는 그리 짧지 않았지요.

옥수수는 가장 소박하면서도 다채로운 곡물입니다. 한 줌만 품어도 온 집안을 노랗게 물들였던 삶, 쪄먹고, 말리고, 죽을 쑤어 입에 넣던 풍경은 이국적인 듯 아주 평범합니다. 중남미의 옥수수 문화부터, 한국의 산간지대와 할머니 손맛이 살아있는 옥수수죽, 뻥튀기 이야기가 엮이며, 한 알갱이 곡물이 전 세계 식탁을 잇는 끈끈한 연결고리임을 보여줍니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곡물의 소비·생산 과정만을 좇지 않습니다. 곡물을 둘러싼 사람들의 기억, 공간, 정서 그리고 변화상의 흐름을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곡물 한 스푼에 담기는 노고와 역사, 그리고 땅 위에서 인간이 누리는 소중한 순간들.

특히, 다양한 인터뷰와 구술 기록이 인상적입니다. 익명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보리는 배고픔에서 구해주었고, 밀은 어릴 적 새롭고 달달했던 백설기 냄새 같았다”는 말, 옥수수 농부가 읊조리는 “너른 들판에서 아이들이 옥수수 뽑아 뻥튀기를 먹던 시절이 그립다”는 기억이 오롯이 전시를 감돕니다. 다양한 시대의 식탁 도구, 포장지, 사진, 그리고 곡물의 현미경 사진까지. 이 작은 곡물이 어떠한 경로로 우리의 한 끼에, 그리고 마음에 닿게 되었는지, 관람자는 천천히 시간의 흐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전시장 바닥을 밟습니다.

이렇듯 곡물의 변화상에는 사회와 문화, 그리고 경제적 변화까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도시화 이후의 즉석 식품 문화 등장, 농업 정책의 변화, 세계화 길목에서 흘러들온 새로운 먹거리가 식탁을 물들인 과정을 전시는 가볍고 따뜻하게 풀어냅니다. 전시장을 나서며, 관람객들은 어릴 적 엄마의 손, 시장통 냄새, 함께 밥을 나누던 고향 사람들의 목소리를 재생하게 되지요. 먹는 것은 단순한 에너지의 섭취이자, 동시에 사회와 문화, 가족·공동체의 기억, 각자가 건너온 삶의 풍경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곡물의 소비가 건강과 환경, 윤리적 의미로 한층 더 확장되고 있습니다. 밀가루와 정제 곡물에 대한 문제의식, 보리·귀리 등 전통 곡물의 재발견, 옥수수 기반 대체식품의 등장까지, ‘곡물’은 더 이상 추억 속의 풍경이 아니라 오늘식 소비와 취향, 그리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식문화의 척도가 되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도, 한 모금의 보리차와 구수한 뻥튀기, 따스한 빵 한 조각이 지금 이 자리, 그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줍니다. 곡물 이야기에는 삶과 자연, 사람에 대한 고요하고 따뜻한 기록이 진하게 베어 있습니다.

가슴을 데우는 탄수화물의 연대기, 우리 모두가 매일 마주하는 평범한 식탁의 풍경이, 결국 켜켜이 쌓인 삶의 결을 보여줍니다. 익숙한 것에 스며든 세월과 기억. 그 속에서 오늘의 나를, 오늘의 우리 가족을, 그리고 사회의 변화를 조용히 마주해봅니다.

하예린 ([email protected])

‘보리, 밀, 옥수수’를 통해 본 식문화 변화상…’탄수화물 연대기’ [전시리뷰]”에 대한 4개의 생각

  • panda_laudantium

    곡물의 연대기…이젠 우리도 탄수화물 디펜던트에서 벗어날 때 아닌가요? 🍞🌽🧑‍🌾 어릴 적 보리밥 먹던 시절도 그립긴 한데 21세기 식탁은 단백질파워! 옛 추억 소환은 좋은데, 이제 곡물은 약간 비주류 느낌. 그나저나 전시라…구경은 가보고 싶네. 혹시 가면 시식할 수 있음? (중요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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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리밥 자주 먹던 때 생각난다 ㅋㅋ 그때 진짜 줄여 먹고싶어서 억지로 먹은 적도 있음. 근데 지금은 일부러 찾아 먹는 게 또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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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 판타지로 미화하지 말고, 곡물소비 구조나 식량 문제도 더 깊이 다뤄야 하지 않을까요? 맥락 없는 음식 동경은 오히려 옛날로 퇴행하는 느낌. 새로운 식생활 변화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런 전시, 시식 코너 없으면 아쉽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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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물이 주는 따뜻한 정서, 요즘같이 각박한 시대에 더 찡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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