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노후대책(策)은 노후대책(冊)으로

겨울 저녁이면 유난히 더 묵직하게 내려앉는 고요 속에서, 한 권의 책을 펼친다. 종이 냄새와 잉크의 흔적, 그리고 책장이 넘어가는 사각거림은 잠잠한 마음을 일으키는 작은 파도 같다. 우리 사회가 ‘노후대책’을 고민할 때 떠올리는 건 대개 보험, 연금, 아파트 담보와 같은 재무적 장치들이지만, 진짜 대책은 어쩌면 이런 책 한 권, 저녁의 고요 속 다른 세상에 귀 기울이는 시간일지 모른다.

2026년이 된 지금, 고령화는 경제 섹션의 단골 소재다. 각종 통계와 전문가 의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때 당연하게 여겨졌던 ‘인생 2막의 불안’은 이제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우려로 격상됐다. 독신의 삶, 자녀 없는 부부, 혹은 일찍 홀로 선 사람들까지. 노후의 막연함은 숫자가 아닌 얼굴과 감정, 각각의 목소리로 다가온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노후대책(策)은 노후대책(冊)으로』라는 문장이 울림을 준다. 책(冊)과 대책(策). 서로 닮은꼴 한자가 겹칠 때, 삶과 생각이 겹친다. 온갖 보험 상품과 연금 플랜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한 권의 단단한 책이 더 든든한 친구가 되는 시절에 우리는 서 있다.

대한민국처럼 빠르게 늙어가는 사회에서 노년의 풍경은 더 이상 과거 세대의 그것과 닮지 않았다. 여가와 고독, 소외와 자아실현이 모두 혼재한다. 스마트폰과 짧은 영상에 익숙해진 청년조차도 인생 후반전에선, 잊어버린 긴 문장 한 줄의 위로를 원하게 될지 모른다. 최근 여러 출판 동향 자료들을 떠올려 본다. 시니어를 겨냥한 인문서, 에세이, 건강서적 등이 이전보다 더 다양해졌고, 북카페·독서동호회·온라인 커뮤니티가 노년층의 또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책이 취미를 넘어 생존의 한 방식,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특히 백발이 성성한 독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책 한 권 덕분에 외롭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며 잠시 과거로, 때론 미래로 여행한다’고. 이들에게 책은 동네 서점에서 파는 단순한 상품이 아닌, 메마른 일상 속 작은 숲이자 가장 깊은 대화의 상대다. 사회학적 관점에서도, 혼자 사는 노인의 정신 건강이나 정서적 안정감을 높여주는 데 ‘독서’가 유의미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는 점점 늘어난다. 영국이나 일본처럼 독서 치료나 문학 처방이 제도화된 나라의 사례를 보면, 문화적 자원으로서의 책은 경제적 자산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번 겨울, 서울 시립도서관의 ‘노년 독서회’에 참여한 이들의 표정은 익숙한 담론을 벗어난다. 퇴직 후 일상의 허전함 대신, 한권 한권 쌓이는 서가를 보며 자부심을 품는다. 누군가는 장 그르니에의 ‘섬’에 기대고, 또 다른 이는 有川浩의 소설 속 인물에게서 삶의 용기를 얻는다. 『노후대책(冊)』은 이렇듯, 정답 없는 인생의 늦가을에 거듭 펼치는 지도의 숨은 조각이다. 우리는 흔히 노후를 ‘관리’의 관점에서만 접근하지만, 감정과 의미, 내면의 길을 탐색하는 데 책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안내한다는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진실을 외면해 왔다.

물론 현실의 벽도 높다. 아직까지도 노인 빈곤율, 세대 간 디지털 격차, 문화 접근성의 한계는 엄존하고 있다. 하지만 작은 변화는 분명히 시작되고 있다. 지방 도서관 건립이 늘고, 대형 서점의 시니어 아카데미·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이 알려지며, ‘늦깎이 독서가’들이 새로운 영웅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책으로 외로움을 이겨냈고, 또 누구는 책을 지우개 삼아 불안한 마음을 살짝씩 지워간다. 성장한 자녀 대신, 늘 곁에 머무는 활자 친구들이 생긴 지금, 우리의 노후대책(冊)은 이미 우리 곁에 서 있다.

흐릿한 거울 앞에서, 우리는 문득 떠나간 시간들을 돌아본다. 바쁘게만 달려온 청장년 시절에 놓치고 온 감정, 가볍게 넘겼던 책 한 장의 울림이 이제야 다시 손에 잡힌다. 늦지 않았다. 책은 줄곧 그 자리에 있었고, 이제야 비로소 우리의 시선이 그곳에 머문다. 은은한 겨울 햇살에 활자가 반짝일 때, 우리는 또 한 번 삶의 의미를 묻는다. 노후의 진짜 대책은 결국 삶의 내면에 남겨지는 이야기가 아닐까. 오늘도 책장은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한 장 한 장 넘어간다.

— 정다인 ([email protected])

[세상읽기] 노후대책(策)은 노후대책(冊)으로”에 대한 4개의 생각

  • 책이 대책이라니… 좀 웃기다만, 가끔은 필요한 말인듯. 현실은 안 바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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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뜻한 칼럼이네요. 현실적인 대책 찾기도 바쁘지만, 내 마음 돌보는 책 한 권의 힘 무시 못하는 듯합니다. 앞으로 이런 문화 이야기 많이 소개되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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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후엔 책 읽을 여유가 있어야지… 요즘 세대는 그마저도 힘들 듯.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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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이 노후대책이라니 ㅋㅋㅋ 보험은 못 믿겠고 책 한번 사서 노후 해결해볼까? 📚 그래도 글은 따뜻하네. 현실은 뭐… 불안하지 ㅋㅋ 늘 미래 걱정뿐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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