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빛의 경계, 영화『어쩔 수가 없다』가 보여준 한계와 파격
흐린 초저녁, 무채색으로 가라앉은 거리 한켠. 첫 장면부터 카메라는 바닥을 스치고 지나가 골목 흔적을 천천히 훑는다. 주인공 민준은 헐렁한 점퍼에 구겨진 손, 어딘가 ‘더 해본’ 남자의 걸음으로 비를 두드리며 걷는다. 2026년 3월 초 서울 시내 한 극장. 이곳에선 ‘어쩔 수가 없다’의 시사회가 열렸다. 감독은 유수의 단편상을 거머쥔 홍태윤, 이번엔 장편이라는 거친 사막에 처음 도전한 터라 눈빛이 더욱 매섭다. 이날 극장에 모인 평론가‧관객들은 예고편부터 내세운 거친 리얼리즘, 그리고 화제를 모았던 묵직한 주제 의식에 높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긴장감은 시작에서 곧바로 전압처럼 전달된다. 엇갈리는 카메라 워킹, 다큐멘터리식 인물 클로즈업. ‘어쩔 수가 없다’는 이름처럼 등장인물 각자의 ‘피할 수 없는’ 선택들을 냉철하게 응시한다. 민준은 빈곤에 내몰려 작은 범죄에 연루되고, 옆집에 사는 영오는 끊임없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기로에 선다. 감독은 이들을 구원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거칠게 들이댄다. 화면은 자주 흐릿해지고, 불안한 시선이 휘청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피부에 와닿는다.
가장 각인되는 구간은 중반부다. 시장골목에서 벌어진 충돌, 좁은 셋방의 집요한 침묵, 인물들이 내뱉는 툭툭 끊기는 대사에서 불쑥 삶의 단면이 드러난다. 편집은 템포를 자유롭게 오가며, 사건의 ‘다음’을 과감하게 자른다.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갈 때, 카메라는 꼭 말미에 시선이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뚝 끊긴다. 관객은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인물들의 다음 행동을 지켜봐야 한다. 이는 불친절하다 느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화의 목적성을 고민하게 만든다.
한편, 영상기자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흔히 볼 수 있는 ‘영화적 미장센’보다 현장의 ‘질감’에 집착한다. 배우들의 표정은 과장 대신 미세한 동요, 카메라는 담배연기 넘어 무심하게 실내를 스캔한다. 시끄러운 BGM 없이, 생활 소음과 대화, 거리의 자동차 소리가 사실감을 책임진다. 거절당하는 신, 화해 대신 어색한 침묵으로 마무리되는 엔딩에선 현장에서 녹아든 생생함이 오히려 더 무겁다.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취재 현장을 누빌 때와 비슷하다. 숨막히는 거리, 비를 뚫고 쏟아지는 소리들, 그 틈에서 일상을 담아내는 순간들의 감각이 영화 전체에 숨겨져 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처럼, 영화 안팎의 제약들이 도리어 힘이 된다. 예산의 한계가 느껴지는 씬, 단출한 세트, 한두 명으로 압축된 출연진. 하지만 이것이 단점이라기보다, 오히려 개성이다. 다른 작품들이 예쁘게 다듬은 감정선과 설정을 ‘일부러’ 걷어차며, ‘도망칠 데 없는 벽 앞에 선’ 청춘들의 생생한 체온을 잡아낸다.
비슷한 리얼리즘 영화들과 비교하면, ‘어쩔 수가 없다’는 박찬욱, 이창동 같은 선배 감독들이 보여줬던 ‘상징’보다 노골적으로 직설적이다. 상징이 불필요한 만큼, 현실은 더 낡고 투박하게 – 하지만 거짓없는 얼굴로 스크린에 박힌다. 주요 외신 리뷰도 이 점에 집중한다. Variety엔 “가난과 체념의 거리를 날것으로 잡아낸 동세대의 필름”이라고 씌여 있다. 일본 Asahi Shimbun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냉혹한 현실을 고대영화적 시점에서 재구성했다”고 적었다. 다만 서사 진행이나 감정선 깊이에선 개연성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서브플롯의 얼개가 느슨하고, 인물 갈등이 심리적 설명 없이 드라이브되는 부분에서 몰입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자 역시 현장관찰자로서 이 점을 분명하게 느꼈다. 강렬한 장면과 생생함이 때로는 충분한 설명이나 동기를 희생하면서 얻어진 결과로 읽혔다.
영화가 남긴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결코 간단히 해석되지 않는다. 시계를 바라보는 민준의 표정, 바닥에 떨어진 영수증 한 장, 아무 말도 없던 마지막 롱테이크까지. 이 영화는 관객이 무엇을 결론 내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은 그저 그렇다’는 – 어쩔 수 없는 순간순간의 나열을 제시한다. 관객은 분노하거나 체념하거나, 혹은 아무렇지 않게 극장을 나선다. 하지만 키 작은 골목들, 오토바이 엔진 소리, 비틀거리는 실내등의 떨림이 묘하게 뒤통수를 친다. 시간은 흐르고, 인물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혹은 아주 약간 다른 곳에 머문다. 영화의 속도를 좇다 보면, 결국 그 어떤 해답도 남기지 않는 현실만이 가득하다.
다만, 분명한 건 이 영화가 ‘멋있게 꾸민 척’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직한 촬영, 의도적으로 거친 편집, 그리고 배우들의 미감 없는 자연스러운 연기. 2시간 남짓이 흐르고 나서야야, 기자의 손끝엔 다시 한 번 우리가 놓치고 있던 ‘미묘한 현실감’이 남는다. 장면, 순간, 그리고 인물들의 작은 표정 하나까지 카메라가 따라가며 현장을 기록하듯 눈에 담아내려 했던 이 영화의 숨결이 오래도록 머문다.
백하린 ([email protected])


감독 연출력이 돋보이네요 👍 리얼리즘 좋아하시는 분들 필람🥲
현실 그 자체 느낌임 ㅋㅋ 요새 한국 독립영화 이런 스타일 점점 많아지는듯? 생각할거리 생겨서 굿임ㅋㅋ
와 근데 이런 영화 진짜 좋아함 ㅋㅋ 중간중간 편집과 장면연결보고 세상생활 다 담았다는 느낌 쩔었음. 고전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 느낌, 대사 텍스트 친절하지 않아서 오히려 몰입됨ㅋ 감독님 다음작은 설명 좀만 더 플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