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와 90년 전 백석의 교차점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성들은 세계적 문학과 종종 조우했다. 그 선두에는 시인 백석도 있었다. 최근 한 문학계의 주목을 받은 사료에 따르면, 백석은 1936년 조선일보에 쓴 칼럼에서 이미 제임스 조이스를 언급했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Ulysses)가 한국어판으로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것은, 그 ‘난해함’이 오히려 동시대 한국 독자에게도 여전히 도전으로 작동한다는 방증이다. 백석의 사례가 시사하는 점은 한 작가가 자국의 근대화·일상성의 문제를 넘어, 타자의 복잡한 내러티브와 단서를 적극적으로 읽어내고자 했던 의지에 있다. ‘율리시스’가 20세기 문학사의 마지노선이라면, 한국 식민지 문학도 그 변방에 머물지 않았다는 맥락이다.
요컨대 이번 기사는 ‘율리시스’ 속 ‘16’이라는 숫자와, 이를 바라보는 문학적 시선의 다층적인 의미망에 초점을 둔다. 1922년 6월 16일로 한정된 소설 내 하루, 즉 ‘블룸즈데이’가 자리하는 16이라는 표식은 일상의 반복에서 역사의 자세한 하루로 확대된다. 조이스의 서술은 ‘16’이라는 수의 단순 기호에서 멈추지 않고, 주인공 블룸과 데달루스가 각자 겪는 구체적 체험의 겹침을 통해, 한 도시와 한 개인의 궤적을 겹쳐내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서술자의 직접적인 해설보다는, 톱니처럼 맞물리는 현실의 흐름과 의식의 파편화를 통해 구현된다. 최근 국내외 젊은 비평가들은 16을 ‘하루의 사건’이나 ‘삶의 우연’이라는 시각을 넘어, 이 시점이 지니는 역사·사회적 맥락을 복원하고자 한다. 이 흐름에서 백석의 관점 역시, 조선 지식인 특유의 복합적 정체성을 체득하는 한 방식이었다.
‘율리시스’의 ‘16’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석은 단순히 시간의 숫자에 머물지 않는다. 조이스가 설정한 1904년 6월 16일은 본인이 연인 노라 바너클을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다. 작가와 작품, 개인의 기억과 픽션의 유기적 접합이 이루어지는 지점이 바로 이 16이며, 독자에게는 반복되는 하루—하지만 다시없을 하루—의 아이러니를 제공한다. 조이스 특유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내러티브는, 20세기의 도시인에게 ‘매일의 삶’이 어떻게 ‘역사적 사건’이 되는지를 조용히 묻는다. ‘16’을 중심에 둔 해석적 방법도 여기 끊임없이 확장된다. 수많은 학자들은 16장으로 구성된 본문의 구조, 각 장의 서술 속도로 나타나는 리듬,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는 모리 알버트 블룸의 내면 여정까지 촘촘하게 연구해왔다.
이 지점에서, 백석의 1930년대 조이스 언급은 단순한 수입 문학의 소개가 아니라, 당대 조선 지식인들이 ‘세계문학’에 어떻게 접속하고, 자기 환멸과 갈등의 해법을 마련했는가에 대한 한 증거다. 식민지에서 전해진 ‘율리시스’의 파편들이 백석 같은 시인에게 ‘16’을 관통하는 인식론적 단서로 작동했을 수 있다. 그가 번역·소개한 외국문학 목록은 당대 현실 비판의 연장선이었다. 최근 국내 문학평론가들은 ‘율리시스’ 16의 테마를 오늘날 ‘모든 하루의 정치성’으로 읽어낸다. 하루라는 시간의 함의, 즉 수많은 개인적 사건의 집합이 집단적 역사와 연결된다는 사실. 100년 전 조이스가 ‘현대적 의식’의 실험을 기도한 시점과, 한국인 독자가 그 실험에 동참한 지적 표류는 그래서 오늘에도 유효하다.
이제 ‘율리시스’와 ‘16’이라는 표식이 남긴 흔적을 다시 되짚는다. 책을 단순히 폐쇄적인 난해함으로만 읽는 것은 한계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일상도 결국은 ‘역사적 하루’의 연속일 수 있다. ‘16’이라는 숫자는 기억·우연·의식의 교차로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멈춰 있지 않음, 반복하는 것 같으면서도 변화의 여지가 있는 그 시간의 리듬을 말이다.
오늘 조이스와 백석, 그리고 이 숫자에 집착한 해석들은, 과거와 현재, 서구와 동양, 작품과 일상 사이 경계를 넘어선 대화를 가능케 한다. 조용하지만 흔들림 없는 관찰이 이 소설과 우리 삶을 연접한다. 문학의 진정한 ‘교차점’은, 바로 이 일상의 하루, 평범한 숫자 하나에서 확장되는 인간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 이상우 ([email protected])


이런 글 쓰는 사람은 읽긴 했을까? 진심 궁금함😅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한국 근대 지식인과 만나 새로운 해석을 생산한다는 점, 흥미롭습니다. 숫자의 상징과 더불어 인생의 단면까지 재해석 되어가는 과정이야말로 문학의 확장성이 아닐지요. 다만, 그러한 의미 역시 한정된 지식인의 경험에 머무는 것이 아닌, 시대와 삶의 보편성을 획득하길 바랍니다. 전문적인 논평 감사합니다.
이런 식의 문학 해석에서 식민지 시기의 지식인들과 근대의 노력이 의미 있게 재조명된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16’이라는 상징이 단순 수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일상성과 역사성의 교차점에서 등장인물의 혼돈이 곧 우리의 현실 같네요…문학이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현대문학 읽으면서 느끼는 가장 큰 장벽은 여전히 번역과 해석이겠죠. 숫자 하나에 담긴 감정과 사회성이 이렇게 깊게 연관될 줄은 몰랐어요. 백석도 이런 고민 했을지 궁금하네요😌
율리시스 아직도 포기한 사람 많지ㅋㅋ 어렵긴함
오! 백석이 조이스를 알았다니…생각지도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