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영화] ‘힐러리와 재키’, 침묵이 만든 두 여성의 서사
깊은 밤의 영국 컨트리하우스처럼, ‘힐러리와 재키’는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운 형제애 뒤편에 소리도 없이 파문을 남기는 비밀들과 상처들을 품고 있다. 언니와 동생, 한 쌍의 클래식 음악 거장 자매. 재키 뒤에 남겨진 힐러리의 마음은 언제나 단정하게 다듬어진 피아노 현처럼 팽팽하게 감춰져 있었다. 영화를 본 순간, 우리는 고백이 아닌 침묵, 질문이 아닌 눈빛에서 역동하는 감정과 삶의 결을 만난다. 그날의 런던, 오케스트라 장 내 자리 잡은 첼리스트의 손끝에서, 나란히 앉은 두 여성의 시간은 겹치고 비켜가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 작품은 실화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누군가 직접적으로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묻지 않은 진실들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자매이면서도 ‘삶의 무게’가 닿는 결이 너무 달랐던 이야기.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던 두 사람. 재키(재클린 뒤 프레)는 천재성을 타고난 첼리스트다. 세계의 빛 속에서 노래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고독을 안고 살아간다. 힐러리, 그 언니는 피아니스트라는 정체성과 가족이라는 운명을 번갈아 쥐고, 동생과의 관계 속에서 변함없는 사랑 혹은 숨겨진 열등감을 마주한다. 이 영화는 두 여성의 대립과 화해의 궤적을 좇으면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말하지 않는 것’은 때로 더 큰 통증이자, 손씻지 못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가 내내 붙잡고 있는 건 ‘표면 아래’를 감각하는 시선이다. 힐러리의 집 안 풍경,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 첼로 현을 튕기는 손놀림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까지. 각본은 명확한 설명이나 명백한 답변 대신, 사운드와 이미지, 그리고 상대의 표정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직조한다. 눈 크게 뜨고 봐도 쉽게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 — 질투, 연민, 죄책감, 그리고 진정한 사랑.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힐러리와 재키’가 선택한 방식은 사건의 재연이나 진상 규명보다는, 우리가 타인의 인생을 이해하려 애쓸 때 늘 마주하는 ‘그림자’의 감각을 고스란히 옮겨 놓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질문하지 않는 것은 의도적으로 무겁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힐러리의 희생은 가족을 위한 헌신이었을까, 동생을 위한 사랑이었을까? 혹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형벌에 가까운 선택이었을까? 재키의 불안정한 열정, 그리고 언니를 향한 미묘한 시선 뒤에는 단순한 경쟁이나 시샘을 넘어서는 복잡성이 숨어 있다. 영화는 이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의 실타래를 반복해 보여주며, 어느 순간 관객이 그 자리, 그 첼로 옆자리에 앉아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이를테면 ‘오케스트라의 한 음표’만큼 말 없는 물음표가 떠오른다.
여러 비평가와 관객들은 이 영화가 냉철하게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했다. 베리햄 감독은 여성 서사의 한계를 딛고, 진짜 자매애의 서글픔과 따스함을 피하지 않고 그려낸다. 매끄럽게 정리된 해피엔딩도, 놓기 힘든 감정적 폭발도 없다. 오히려 끝나지 않는 대화, 불러내지 않은 사과,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상처 — 그 속에 우리가 느끼는 진짜 삶의 복잡함이 있다. 현재 한국영화가 가족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과 비교해 볼 때, ‘힐러리와 재키’는 오히려 말하지 않는 것, 묻지 않는 것의 무게를 강조하면서 도리어 담담한 성찰로 관객을 이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떠올리는 건 결론이 아니라, 절제된 침묵의 여운이다. 누가 누구를 죄인으로 만들고 누가 누구의 구원이 되는가? 오히려 답이 없는 시간 속에서만 진실한 이해가 시작된다는 걸, 우리는 이 영화 속 손끝, 숨결, 얼굴의 주름살 속에서 알게 된다. ‘힐러리와 재키’는 화려하지 않은 은유 — 마치 겨울 저녁창에 성에처럼,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네준다. 그러니 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의 음악처럼 서로를 이해하려 애쓸 수 있다. 빛은 언젠가 창을 타고 우리 곁으로 번지니까.
— 정다인 ([email protected])


짧은 리뷰지만 좋았습니다!! 자매간 감정선이란 게 결국엔 누구도 설명 못 하는 부분이죠.
영화평 잘 읽었습니다👍 첼로 음악소리에 빠져보고 싶어지네요. 현실 자매들한텐 흔치 않은 공감일 수도 있겠지만, 애틋해 보여요.
재키 잘 몰랐는데…영화보고 첼로 한 번 배워볼까 생각 중임ㅋㅋ 음악의 힘이란…
이 영화가 그런 깊이를 가졌는지 의문입니다!! 영국 실화라서 과대평가되는 거 아닙니까? 음악영화 답지 않게 정작 음악에 대한 진중한 분석은 부재하군요!! 자매간 감정만 앞세우는 연출이라면 이 또한 상업미화일 뿐!!
실존 인물 영화도 결국은 감정팔이 스토리로 귀결되는구나… 뭐 나름 잘 뽑았으면 인정할 듯
영화평에 등장한 ‘침묵의 무게’라는 표현이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대사로 푸는 감정이 아니라 미묘한 표정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짜 영화미학이라고 봅니다. 다만 실존 인물의 서사를 다루면서 역사적 사실과 예술적 각색 사이에서의 균형은 충분히 검토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음악영화에 음악 그 자체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느껴져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묻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하셨는데,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쉬운 선택인데도 하지 못하는 말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영국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이렇게 정제된 감성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적입니다. 음악의 힘이 우리 모두에게 울림이 되기를 바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