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의 워라밸, K-기업문화의 희망인가 현실적 과제인가
유한양행이 ‘일·생활 균형 우수기업’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고무적이다. 특히 ‘청년의사’ 보도를 통해 알려진 이번 사례는, 국내 기업들이 워라밸(Work-Life Balance)의 가치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보여주는 긍정적인 신호탄으로 읽힌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개별 기업의 성공 사례를 단순한 미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유한양행의 성과 뒤에 가려진 한국 사회 전반의 워라밸 현실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할 시점이다. 단편적인 성공 뒤에 숨겨진 구조적 문제들을 직시하고, 지속 가능한 변화를 위한 로드맵을 그려야 한다.
유한양행이 우수기업으로 선정된 배경에는 단순히 근무 시간을 단축하는 것을 넘어, 직원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유연근무제 확대, 자율적인 연차 사용 장려, 육아휴직 및 가족친화 정책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 문화 개선을 위한 경영진의 강력한 의지와 실천이 뒷받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선도적인 노력은 직원들의 만족도와 몰입도를 향상시키고, 이는 다시 기업 생산성 증대와 혁신 역량 강화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우수 인재 유치 및 유지에 결정적인 경쟁력으로 작용하며, 궁극적으로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기여한다. 실제 많은 국내외 연구 결과들은 워라밸이 잘 갖춰진 기업이 단순히 직원 복지에 그치지 않고, 재무적 성과와 시장 경쟁력 면에서도 우위를 점한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입증하고 있다. 유한양행의 사례는 기업들이 워라밸을 ‘불가피한 비용’이 아닌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자’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는 인적 자원이 곧 기업의 핵심 자산인 현대 사회에서 더욱 중요하게 각인되어야 할 교훈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워라밸 현실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에 속하는 연간 근로시간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함을 보여준다. ‘근면’이라는 미명 아래 장시간 근로가 용인되는 문화는 개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사회 전반의 활력을 저하시킨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워라밸 격차는 심각한 수준이다. 자원과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서는 유연근무제나 충분한 육아휴직 제도 도입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정 산업군이나 직무에서는 여전히 ‘야근은 필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며, 이는 청년층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준다.
‘청년층’에게 워라밸은 이제 연봉 못지않게 중요한 직업 선택의 기준이 되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취업난 속에서 워라밸보다는 고용 안정성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벌어지며, 이는 결국 장기적으로 국가의 잠재 성장률을 갉아먹는 요인이 된다. 여성 경력 단절 문제 역시 워라밸 정책이 미흡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어려운 구조는 개인의 삶의 질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 이처럼 워라밸은 단순히 개인의 복지를 넘어, 노동 시장의 효율성, 성 평등, 그리고 국가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좌우하는 핵심 사회 의제인 것이다.
정부와 사회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 해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단순히 ‘워라밸 우수기업 선정’과 같은 상징적인 조치에 머무르지 않고, 중소기업들이 워라밸 정책을 도입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인센티브와 컨설팅을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유연근무제 도입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 확대, 전문 컨설팅 비용 지원, 그리고 고용보험 기금을 활용한 대체인력 지원 강화 등이 필요하다. 유연근무제의 법적 보장을 강화하고, 남성 육아휴직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불필요한 야근 문화를 근절하기 위한 사회적 캠페인과 함께 기업들의 자율적인 노력을 독려해야 한다. 또한, 성과 평가 시스템을 근로 시간보다는 실제 성과와 효율성에 집중하도록 전환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조직문화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최고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와 리더십이 요구되며, 중간 관리자들의 변화 수용 또한 필수적이다. 해외 선진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한국적 현실에 맞는 워라밸 모델을 개발하고 확산하는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워라밸은 개인의 삶의 질을 넘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일하는 방식의 혁신은 저성장 시대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으며, 저출산·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대한민국에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유한양행과 같은 선도 기업의 사례는 분명 한국 기업문화의 긍정적인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소수의 기업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기업, 정부, 그리고 모든 사회 구성원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 워라밸을 향한 여정은 단순히 특정 기업의 ‘우수성’을 칭찬하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미래를 설계하고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삶의 토대를 물려주기 위한 중요한 과정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제를 외면할 수 없다.
— 김현우 (h.kim.reporter@exampl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