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봉 별세, 세대를 잇는 배우 가족의 굳건한 유산

한국 영화와 드라마 초창기부터 전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던 원로배우 윤일봉이 12월 8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대 후반 브라운관에 처음 등장한 이래, 60년이 넘는 시간을 한결같이 대중 옆에서 걸어온 그의 삶은 물론, 뒤를 이은 가족들까지도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그의 별세로 인해 무용가 윤혜진은 부친상을, 배우 엄태웅은 장인상을 맞았다. 고인의 빈소에는 영화·방송계 동료뿐 아니라 후배 배우들과 인연이 닿은 예술계 인사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애도를 표했다.

윤일봉은 1934년생으로, 1957년 영화 ‘피아골’로 데뷔했다. 넉넉한 체격에 희고 반듯한 얼굴, 신뢰감을 주는 깊은 눈빛은 그가 연기한 부드러운 아버지, 신념 있는 지사, 품격 있는 스승 캐릭터를 떠올리게 한다. 1970~80년대에는 교복이 트렌드 아이템으로 자리 잡던 시기에 고등학생 아들딸을 둔 가장 역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타이와 V넥 스웨터만큼이나 한국적 남성 캐릭터의 클래식 아이콘이 되어준 인물이다. 근래 드라마 ‘신기생뎐’, 영화 ‘강남1970’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새삼 선보였던 것도 인상적. 유행을 따르기보다 언제나 본연의 품위를 간직했던 그의 패션 선택 역시 닮고 싶은 레트로 스타일의 한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윤일봉의 가족 역시 한국 대중문화의 중심축에 있다. 무용가로서 클래식과 모던을 넘나드는 윤혜진은 결혼 후 강단에 서는 등 아이돌 못잖은 팬덤을 드러냈다. 사위 엄태웅은 밝은 미소와 담백한 연기로 2000년대 젊은 배우 군단의 중심에 올라섰다. 세대를 넘어 무용과 영화, 예능 등 엔터테인먼트 각 분야에서 활약 중인 참된 예술가 집안이라 할 만하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 엔터계의 최근 경향과 닮았다. 걸그룹 뉴진스를 필두로 2, 3세 아티스트가 엔터 산업을 리드하는 흐름에서, 윤일봉 가족도 자연스럽게 레거시(legacy) 트렌드를 대표한다.

원로배우의 별세가 연예계와 패션문화에 미치는 여운은 적지 않다. 최근 배우 김영옥, 독립운동가 출신 송재호 등 연로한 인물들의 타계를 수없이 접해온 대중은 인생의 유한함과 함께 잊히지 않는 스타일의 가치를 새삼 실감한다. 지속 가능성과 빈티지, 가족 중심의 따뜻한 패션이 다시 일상이 되는 이 시점에 윤일봉이 보여준 심플하고 격식 있는 룩, 일상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태도는 지금의 Y2K 패션 붐이나 복고적 취향에서 또 다른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영원한 아버지상으로서의 클래식 수트, 세련된 체크 자켓, 단정한 셔츠 등은 지금 돌고 돌아 재해석되는 패션 트렌드의 근원이기도 하다.

윤일봉에게 배우란 ‘사는 대로 연기하고 연기한 대로 산다’는 말이 어울린다. 기술과 습관이 아닌 삶의 경험이 자양분이 되어 스크린과 무대 위에서 사람 냄새를 풍겼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삼각관계’ ‘한강은 흐른다’ ‘열여덟의 순간’ 같은 시대극에서부터 가족 드라마, 종편 예능까지 가리지 않는다. 세련된 아웃핏 속에 숨은 배려와 정직함, 신념과 따뜻함—이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클래식 패션 코드로 읽힌다. 이제 점점 잊혀가는, 그러나 다시금 회자되는 이런 미덕과 스타일은 젊은 세대에게도 묵직한 화두가 된다.

오늘날 패션계는 ‘레트로’, ‘뉴트로’를 힘껏 소비하는 중이다. 셔츠 끝을 질끈 매고 교복 재킷을 탈크로 입으며 배우 윤일봉 세대의 미학을 다시 마주하는 이 순간,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떠나도 스타일은 남는다. 연예계의 화려한 아이콘들이 은퇴하고 돌아가는 매 순간, 고인이 남긴 잔향은 사진 속 패션, 영상과 음성, 그리고 세대를 잇는 감동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이다. 물리적 삶은 끝났지만, 그 존재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스타일과 미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 그게 진정한 배우의 유산이다.

— 오라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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