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12.3’의 무대 위, 조성우 음악감독의 시간

빛이 어슴푸레 채 가시지 않은 무대 위에, 첫 소리가 내릴 때마다 새로운 우주 하나가 출현한 것처럼 공간은 숨을 쉰다. 관객의 옷자락 사이로 스며드는 어둠과 잔상, 그 심연을 밀고 들어오는 것은 조성우 음악감독이 빚어낸 음의 실루엣이다. 이번 ‘란 12.3’을 통해 그는 음악감독으로서, 동시에 가장 예민한 감각의 기록자로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냈다.

공간을 가르는 현의 떨림, 번지는 음표의 미세한 입자, 조성우의 음악은 마치 촉각과 시각, 청각을 번갈아 자극하는 파동과도 같다. 그가 설계한 이번 작품 속 사운드 레이어들에 귀를 기울이면, 단순한 멜로디를 넘어 이야기가 갖는 깊은 무드와 숨결마저 세밀히 짚어내려는 집념이 묻어난다. 음향은 단 한 곳, 단 한 순간에 집중되지 않는다. 무대 구석구석을 타고 흐르는 듯 유영하는 사운드는 조용히, 그러나 강인하게 시공간을 교란한다.

‘란 12.3’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번 공연은 수치와 시간,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숫자적 질서까지, 음악 그 자체로 전달한다. 실제로 다른 동시대 공연들과 대조해보면, 여백과 침묵이 소리만큼이나 두드러지게 배치된 점은 탁월한 미덕이다. 음 하나하나, 쉬어 가는 박동조차 무대에서의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배경음이 아닌, 이야기의 중요한 주체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평가들도 이번 사운드 프로덕션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극적 전환의 순간마다 조성우 특유의 신경질적이지만 섬세한 믹싱이 빛난다.

최근 공연계가 디지털 편집과 즉각적 콘트롤만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흐름에 빠지는 와중에도, 그는 아날로그의 감각을 놓지 않는다. 직접 악기를 고르고, 마이크를 세팅하며, 현장성을 극대화하는 과정은 앨범 한 장을 잡히는 손끝의 온도로 빚어내는 바느질 같다. 이런 접근은 무대의 바람, 의상 천의 반사음, 배우의 호흡이 악보처럼 음악으로 수렴되는 드문 경험을 선사한다.

이러한 사운드 설계와 미학은 국내외 평단 모두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기존의 틀에 안주하지 않는 실험성은 오히려 ‘전통’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는 면이 있다. 일시적 유행에 손을 내미는 대신, 조성우는 오랜 시간 쌓아온 질서와 감각적 통찰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어휘를 구축한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으로, 따뜻한 추억과 찬란한 절망을 동시에 소환한다.

음악감독으로서 조성우는 ‘란 12.3’을 통해 무대 위의 모든 소리가 관객 각자에게 ‘나만의 이야기’로 변주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명이 옅게 번지는 순간, 방금 끝난 장면의 에코가 남을 때, 그리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무대 한 모퉁이에서도 살아 숨 쉬는 음향의 입자 하나가 한 편의 시처럼 마음에 머문다. 무게 있고,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 밀도 안엔 피로와 설렘, 반복적인 리듬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순간의 농밀한 예술적 집중이 있다.

동시대 한국 공연음악 씬에서 ‘기술’을 이야기할 때, 효율·속도·즉흥성만 화두가 되는 시대가 길었다. 하지만 조성우의 이번 ‘란 12.3’은 제자리에 앉아 소리의 공간, 시간, 존재와 유동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는 질문을 던진다. 특별히 무대와 관객 사이, 그리고 배우와 악기 사이에 부유하는 긴장과 여백의 미는 한국형 무대예술 음악이 갈 수 있는 한 지점의 미학적 정점을 보여준다.

관객 각각의 심장박동과 무대의 울림이 동기화되는 듯한 착각, 극이 끝난 후에도 잔상이 남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음 어느 뒷골목까지 이어진다. 공연장의 냉기와 적막, 악기 케이스가 닫히는 소리조차 한 편의 음악이 된다. 한 공연의 성패, 그 이상의 가치를 품은 ‘란 12.3’ 무대를 일군 것은 조성우 음악감독의 예민한 귀와 손, 그리고 놓치지 않는 작은 떨림, 바로 그 감각이다.

— 서아린 ([email protected])

‘란 12.3’의 무대 위, 조성우 음악감독의 시간”에 대한 4개의 생각

  • 분위기 쩔겠다 ㅋㅋ 실제 보면 또 다르려나ㅋㅋ 음향따라 공연 느낌 너무 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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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험해볼만한 공연이네요. 예술이 주는 여운, 항상 소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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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 이정도면 직접 들어봐야겠네. 실황음악이 최고임. 요즘 대중가요랑은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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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음악계에서도 결국 치킨집 사장님 마냥 ‘감각적 감각’ 외치다 3일간 화제, 그후엔 조용🤔 그래도 진지하게 무대음향 묘사한 기사 보니 실감 나긴 함. 다음 번엔 작곡가 인터뷰도 좀 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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