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의 새로운 물결, 리센느‧에이티즈‧엑스러브가 증명한 중소의 반격
음악 방송 무대에서 쏟아지는 조명 아래, 웅장하게 울리는 팬들의 함성. 무대 위엔 익숙한 얼굴이 아니다. 2026년 여름, 서울 강남 한복판, 리센느, 에이티즈, 엑스러브와 같은 중소 엔터테인먼트 회사 소속 아이돌 그룹들이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다. 대형 기획사의 철옹성이었던 K-팝 산업 구조가 미묘하게 갈라지는 순간이다. 잇단 신곡 컴백, SNS 피드의 실시간 트렌드, 각종 글로벌 차트에서 이름이 튀어나오는 이들 그룹 뒤엔 ‘K-팝 중소의 희망 공식’이라는 새로운 해법이 있었고, 이것이 현장의 공기를 바꾸고 있다.
한낮 CJ ENM 센터 앞, 출퇴근길 출입구에서 포토타임을 기다리는 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삼성동 갤러리아몰 사이사이로 속속 등장하는 응원배너, 팬들이 손에 쥔 스티커에는 ‘리센느’, ‘에이티즈’, ‘엑스러브’ 이름이 선명하다. 이들 그룹의 최근 활동을 가까이서 촬영한 내 카메라에는 흔들림 없는 퍼포먼스, 무대장악력이 잡히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무명 시절부터 쌓아온 팬덤의 견고함과 소통방식의 다채로움이다.
리센느는 데뷔 3년차지만, 지난달 신곡 ‘Cycle’로 미국 빌보드 글로벌 차트인에 성공했다. 팬 인터뷰에서 한 10대 팬은 “이제 대형사 안 부럽다”고 말했다. YG, SM, JYP 등 전통 3대 기획사 소속 그룹도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에 진출했지만, 리센느와 같은 중소 소속 그룹의 글로벌 성공은 2020년대까지도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올해만 해도 중소사 소속 그룹 두세 팀이 빌보드, 오리콘 등지에 잇달아 진입하면서 아이돌 시장의 고정관념을 깨기 시작했다.
에이티즈는 팬덤 동원력에서 흔히 말하는 ‘괴물 신인’으로 불리지 않지만, 실제 세계 투어를 20여 개국에서 열며 티켓 파워를 입증했다. 최근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도 멤버들은 “SNS와 자체 유튜브 콘텐츠로 현지 팬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번역팀 없이도 다국적 팬들이 자발적으로 커뮤니티를 구축한다”고 했다. 현장에서 느껴지는 그 현상은, 카메라 줌을 당길 때마다 더 선명해진다. 브이라이브와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나타나는 소소한 진심, 팬들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치거나, 생일마다 깜짝 이벤트를 하는 장면 등이 영상 앵글에 수집됐다.
엑스러브는 OTT 드라마 타이업, 틱톡 챌린지, AR(증강현실) 팬사인 등 첨단 전략으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현장 취재 중 만난 팬들은 “콘텐츠의 혁신성 때문에 덕질이 더 재밌어졌다”고 말한다. 실제 엑스러브의 공식 앱에는 AI 채팅 기능, 실시간 투표 등 현세대 팬 니즈를 반영한 디지털 기술이 녹아 있었다. 이처럼 중소 엔터테인먼트사들은 자체 제작·배급 플랫폼 확보, NFT 앨범, 라이브 커머스 등으로 외형적 한계를 돌파 중이다. 반면 대형사는 비교적 조심스럽게 신사업을 검증했다.
산업적 시각에서 보면, K-팝 중소사의 전략은 빠른 의사결정, 작지만 민첩한 셀 단위 조직력, PD·엔지니어·디자이너 간의 수평적 협업으로 구체화된다. 실제 리센느는 매 앨범마다 해외 전략 컨설팅팀, 다양한 글로벌 음악 프로듀서와의 협업 사례를 늘렸다. 에이티즈는 사전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일본·미국 등 현지 제작진과 계약하며, 무명 시절부터 구글 트렌드, 유튜브 데이터까지 체크한다. 엑스러브는 온라인 팬미팅, 제페토 굿즈, Web3 기술 접목으로 10대-20대 초반 집객력을 높였다. 현장 인터뷰에서 만난 중소기획사 관계자는 “대형 시스템과 스케일에서 실현 못 했던 창의적 기획이 오히려 빠르게 시도된다”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 순발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물론 대형기획사 출신들과의 격차, 국내 유통망 한계, 방송 출연 빈도 등 현실적 장벽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 대기실, 팬사인회 현장에서 일부 차별을 여전히 호소하는 목소리도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건 이같은 실질적 불균형을 차세대 플랫폼, 데이터 기반 마케팅, K-콘텐츠의 다양성·포괄성으로 마침내 돌파하고 있는 현장감이다.
유튜브, 틱톡 등 글로벌 미디어를 통한 팬덤 규모 확장, 직접 소통 능력이 중소 엔터테인먼트사들에게 비약적인 성장의 기회를 준 것은 분명하다. 과거에는 압도적 자본·홍보력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IT기술과 창의력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는 K-팝 패러다임을 주요 도시 곳곳에서 해체 중이다. 카메라가 비추는 무대 뒤, 누군가는 조용히 다음 신곡 발매를 위해 연습실 문을 닫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글로벌 팬들과 실시간 채팅을 시작한다. 현장은 이미 격변 속에 있다.
이제 K-팝 팬덤의 질문은 달라졌다. “누가 소속사인가?”가 아니라, “누가 나와 연결되는가?”로. 결국 이 질문에서, K-팝 중소사의 ‘희망 공식’은 거대한 자본, 완벽한 시스템만이 답이 아니란 가능성을 실증하고 있다.
— 백하린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