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과 ‘클레이페이스’—가을 극장가를 달군 두 개의 흐름
모든 영화는 계절을 품는다. 그리고 이 가을, 극장가에는 두 줄기의 강물이 개봉일의 긴장 위에서 교차한다. 10월 21일,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전 국내 예매 플랫폼 기준 예매량 1위에 오른 것은 안은영 감독의 ‘실낙원’. 한편 동시기 외화 예매 1위는 ‘클레이페이스’가 차지했다. 올해 마지막 분기를 앞두고 한국 영화와 외화의 동시 흥행 기록이 의미심장하다.
‘실낙원’은 개봉일 첫날, 전체 예매율 26.5%라는 높은 수치로 압도적으로 1위를 기록했다. 또래 스토리텔러들이 쏟아내는 상상력의 결에선 한 뼘 더 깊은 서정이 묻어난다. 전작 ‘바람, 그 너머’에서 감정의 미로를 그렸던 안은영 감독은 이번에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영화는 파멸과 구원 사이를 정교하게 오간다. 극 중 주인공의 여정은 마치 늦가을 낙엽처럼, 스스로의 그림자를 통해 허물어진 한계를 다시 일으킨다. 베테랑 배우 김진영, 신예 박서희의 케미, 그리고 촘촘히 보태진 음악까지. 작은 호흡 하나, 침묵과 시선, 모두가 관객을 겨울로 이끄는 황혼길이다.
반면 ‘클레이페이스’는 북미와 유럽에서의 뜨거운 흥행을 타고 상륙했다. 총 1,682개관에서 동시 개봉하며 외화 예매율 1위에 올랐다. 고전 빌런 캐릭터를 새롭게 재해석한 연출, 제이슨 셰퍼드의 특유의 감각이 돋보인다. 익명의 얼굴, 점토 같은 존재를 둘러싼 심리 드라마와 액션의 절묘한 버무림. 평단의 평가는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슈퍼빌런의 초상”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관객들의 열띤 토론과 평점이 빠르게 쏟아지고 있다. 두 영화 모두 완전히 다른 언어로 고통과 해방, 권력과 상처를 풀어낸다.
10월 넷째 주, 국내 극장가는 결국 한 편의 인문학적 서사와 본격 오락 액션, 두 축이 맞붙는 형국이다. 흥미로운 건 관객 구성이다. ‘실낙원’은 20~30대 여성 예매 비율이 48%로 두드러지고, 시사회에서 오열 장면에 눈물을 훔친 관객들이 여럿 목격됐다. 사회적 불안과 개인적 죄책감이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품고 있다는 점이 젊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안긴다.
한편 ‘클레이페이스’ 관객층은 10대 남성을 비롯해 30대 중반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틀에서 벗어난 복합적 심리묘사는 물론,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의 스케일이 김빠지지 않게 건재함을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나이트’에서 그린 무거운 슈퍼빌런, 혹은 MCU가 반복해온 쾌락주의와도 다르다. “악인은 왜 탄생하는가?”라는 질문, 독백처럼 남았다. 어둠의 캐릭터야말로 현대의 초상. 그런 의미에서, 올해 상반기 ‘토템의 그림자’와 상황이 교차된다. 당시 관객들은 악의 근원을 스스로 안아보는 용기를 화두로 삼았다.
다운받듯 소비되는 OTT의 찰나적 유행성과 달리, 극장 스크린의 서사는 여전히 계절을 담는다. 어찌 보면, 한국 영화계 내부의 목마름은 더욱 깊어졌다. 박스오피스 상위 10위 중 5편이 국내 창작물, 5편이 해외 작품이다. 이 수치는 몇 년째 되풀이되는 흐름. 하지만 올 하반기, ‘실낙원’과 같은 장르와 결의 영화가 1위를 기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봉준호와 박찬욱의 질주가 한창이던 2010년대에도 장르적 실험과 정서적 밀도를 동시에 품은 영화들이 늘 변곡점을 만들어왔다. 시대가 급변하고 플랫폼도 변하지만,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실낙원을 꿈꾼다. 누군가는 어렴풋이 스크린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비춰본다. 또 어떤 이는 힘겨운 현실을 잠시 잊고, 거대한 악과의 유쾌한 공존을 즐긴다. 영화는 결국 인생을 닮는다. 그 여운은, 극장을 나서도 멀리 떠나지 않는다.
가을밤 긴 그림자처럼, 오늘 극장가를 물들인 두 영화의 1위 소식은 익숙한 분할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 풍경을 비추는 거울이다. 상실과 구원의 끝, 액션과 심리의 맞닿음 끝에서 서 있는 이 계절이 조금이나마 깊어질 수 있길 바란다.
— 정다인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