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함이란 무엇인가: ‘죽이고 싶은 아이’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

요즘 청소년소설 시장은 그야말로 ‘따뜻함’과 ‘힐링’ 코드가 대세다. 그런 풍토 속에서 <죽이고 싶은 아이>가 50만 부라는 기록적인 판매를 달성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문화현상처럼 읽힌다. 기사에 따르면, 이 작품은 ‘어둡고 불친절하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도대체 이런 책이 왜, 어떻게, 2026년의 독자들에게 손에 쥐어졌을까? 이 질문엔 단순히 ‘충격적인 내용’이라는 이유만으론 답이 되지 않는다.

책의 제목부터가 도전적이다. ‘죽이고 싶은 아이’, 함부로 입에 올리기 쉽지 않은 단어들과 직면하는 감정은, 이 소설이 일반적인 위로의 이야기를 펼칠 의사가 없음이 분명하다. 기사에 명시된 주요 서점과 독서 커뮤니티 반응에도, 극단적으로 차가운 필체와 결코 독자를 돌보지 않는 듯한 인물 심리 묘사가 언급된다. 보통 청소년소설이 문제의 아이들을 “이해받아야 할 상처”로 포장하는 데 그쳤다면, 이 작품은 상처가 곧 현실의 깊은 구문이고, 한 번도 채워지지 않는 구덩이처럼 남아 있음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작가 서유미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인간 내면의 불화와 고통을 직설적으로 건드리는 편이었지만, 이번엔 더 크게 ‘침묵’하는 방식으로 독자의 불안을 끝까지 방치한다. 기사에서는 몇몇 독자가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 채 방치당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작중 인물들의 사고와 욕망, 그리고 이들이 처한 폭력의 근원은 예사롭게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수수께끼 같은 서술, 밖에서조차 손 내밀기 어려운 상황, 그 안에서 방황하는 10대들의 거친 생존 방식이 ‘무심한 어둠’으로 이어진다.

이 어둠과 불친절함, 통증을 독자가 선호하는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몇 년간 이어진 사회적 소외, 공교육 현장의 무기력, 일상에서 반복되는 ‘가짜 감정의 폭주’ 등이 원인일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청소년들과 그 주위의 사회가 심리적으로 더욱 방치되고 있다는 소외감도 작동한다. 동시대 또다른 베스트셀러들—이를테면 좀 더 환상적이고, 교훈적이며 때로는 억지로 희망을 강조하는—작품들이 늘어날수록 <죽이고 싶은 아이>는 차별적인 선택이 되었으리라 본다.

현대의 ‘불친절한’ 문학은 감독 이창동이나 박찬욱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감정의 온도와 유사하다. 안팎으로 간결한 묘사, 절정에 달한 후 내던지는 결말, 그럼에도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실체 등. 청소년소설이라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폭력의 장치, 가족 해체, 또래 집단 내 교묘한 무관심 등이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이나, 한강의 문체와도 겹친다. ‘어둡다’는 평가는 그 자체로 장르적 한계가 아니며, 오히려 엄혹한 시대에서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는 새로운 문학적 욕망의 반영이다.

책을 관통하는 독특한 메시지는 ‘누군가를 미워하되, 미워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시대의 심리다. 기사에 인용된 토론회 현장이나 독자 인터뷰를 들어 보면, 익숙한 ‘화해’나 ‘치유’의 결론 없이도 인정받을 수 있는 고통의 존재, 한 줄기 희망조차 억지라 느껴질 때 현실의 감정에 더 가까워진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런 흐름은 현재의 청소년 독서층이 ‘이해한다는 척’하는 어른들의 언어를 더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싸인과도 같다.

OTT드라마나 영화 업계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감지되고 있다. 최근 1~2년새 흥행에 성공한 한국 청소년 범죄 드라마(‘소년심판’ ‘약한영웅’ 등) 역시 주해석의 친절함보단, 불쾌한 진실을 충격적으로 노출하고 서늘하게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소년 대상 작품만이 아니라 성인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OTT 트렌드는 ‘불편함과 방치의 미학’을 소재화하며, 피로사회적 감정단절, 집단 내부의 폭압, 그리고 방관 그 자체를 드러낸다.

이렇게 보면 <죽이고 싶은 아이>의 성공에는 문학적 문제의식에 더해, 현실감의 증폭과 시대정신을 집약한 메시지가 작동한다. ‘불친절함’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현실의 부정적 감정을 두려움 없이 조명하는 힘이다. 기존 청소년소설의 틀을 깨는 혹독함,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결말까지. 이 모든 것이 독자와 시대의 내적 피로, 끝을 알 수 없는 우울과 공포, 그리고 미처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연속성과 맞닿아 있다.

문제는 이제 이후의 담론과 독자층의 변화다. ‘불친절’이 트렌드가 된 뒤, 그 파장은 긍정적이기만 할까. 독자들이 이 불편함을 단순히 개인의 심미적 해방으로 받아들이는 데 머무를지, 혹은 사회 구조의 치유되지 않는 진실에 눈을 돌리는 마중물로 작동할지는 좀 더 지켜볼 과제다. 다만, 이 책의 대중성은 단순한 자극적 코드를 넘어 사회와 세대 간 심리적 간극을 파고드는 표지처럼 읽힌다. 우리는 이 불친절한 소설을 통해 다시, 불완전한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배운다.

— 한도훈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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