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업계, 경쟁 아닌 동맹의 시대로…속도 붙는 투자시장 합종연횡
국내 벤처캐피털(VC) 시장에 새로운 흐름이 자리잡고 있다. 과거 성장성 높은 스타트업을 두고 경쟁적으로 투자처를 좇던 VC들은 최근 몇 년간 ‘손잡기’ 전략을 확대하는 모습이다. 성장 정체와 투자심리 위축, 비교적 높은 금리와 불확실성 등이 겹치며 단독 리스크 관리가 어려워진 결과이다. 주요 VC들은 공동투자(코인베스트), 신생 VC와의 컨소시엄, 외국계 투자자와의 협업 등 다양하게 조합하며 투자 생태계의 연대와 다각화를 실험하고 있다.
2026년 들어 국내외 불확실성이 심화됐다. 금리 정점과 경기 둔화, 기술 밸류에이션 재평가가 맞물려 스타트업 투자가 ‘묻지마식’ 자금 몰이에서 냉정한 옥석가리기 국면으로 이행했다. 올해 상반기 기준, 국내 스타트업 투자 유치 규모는 2021~2022년 호황기 대비 40% 가까이 축소됐다. 실탄이 줄자 VC들도 리스크를 분산하고 투자 다변화를 위해 적극적 ‘합종연횡’ 모드가 활성화됐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공동투자 비중 확대다. 한화투자파트너스와 소프트뱅크벤처스가 한 뱃지로 중소 AI 스타트업 투자를 단행했고, 국내외 VC 연합으로 이뤄진 커브 파트너스도 헬스케어·바이오 투자에 손잡으며 공동 DD(실사)와 관리 리스크 분산에 집중했다. 후발 신생 VC들은 독자적 레코드를 쌓기보다, 기존 VC 및 CVC(기업주도 벤처캐피털)와의 딜싱크를 늘려 기회 확보에 무게를 실었다. 일부는 글로벌 플랫폼 펀드를 통해 실리콘밸리나 동남아 등 해외 네트워크에 펀드를 실었고, 역으로 해외 VC와 조인트펀드로 국내 투자를 유치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이는 과거처럼 대형 VC가 시장을 쥐락펴락하던 힘의 불균형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산업별 맞춤형 심사와 멘토링이 가능하게끔 한다는 것이 현장 주요 관계자 공통된 평이다.
합종연횡 현상의 이면(裏面)에는 ‘공멸 방지’ 목적이 짙게 깔려 있다. 스타트업 투자 시장의 파이가 급격히 줄면, 경쟁자는 곧 시장 붕괴의 동반자가 된다. 벤처 투자 기반 생태계가 위해를 입으면 VC 자신도 성장 모멘텀을 잃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도 이 점에서 이미 여러 합작 투자 모델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인 바 있으나, 시행착오와 이익 배분 문제를 꾸준히 겪고 있다. 국내 판도 마찬가지다. 투자 집행 속도가 합의 구조로 인해 늦어지고, 투자실적 일부를 나눠야 하기에 단독 투자 대비 기대 수익률은 다소 깎인다. 하지만 이런 약점조차 ‘공동 패자 회피’를 최우선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묵인되는 경우가 많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VC 업계의 동맹 확대는 자본 시장 구조 재편을 예고한다. 특정 VC의 독주가 힘을 잃고, 산업별 테마형 컨소시엄·신생 VC와 중대형사 간 협력 모델이 늘어나면서 전체 투자 건별 딜 규모는 하락하더라도 기회의 폭이 넓어지는 셈이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도 한 명의 갑 대신 여러 투자자와 소통하며, 전략적 검증과 네트워크 지원을 받는 것이 경쟁 우위로 작용한다. 그러나 단기적으론 투자 의사결정까지 리드타임이 길어지고, 모든 분야에서 대형화/연대화가 무조건 해법인 것은 아니다. IT·바이오, 딥테크 등 고위험 고수익 군에서는 여전히 단일 VC의 노골적 승부수도 남아 있다.
특이점은, 최근 운용사와 자산관리사(AMC), 정부기금 등 대체투자 영역에서도 유사한 합종연횡 붐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주요 연기금·정책 금융기관이 ‘멀티GP'(복수 벤처운용사) 체제를 정례화하면서, 초기 스타트업의 성장 루트가 과거보다 한층 복합적 구조로 짜이고 있다. 금융기관 입장에선 리스크관리를 고도화하고, 각 VC의 현장 전문성을 공유받는 이점이 부각된다. 다만 정부지원 성격의 딜에서는 이합집산이 ‘대형 위주 쏠림’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제도적 방파제 마련, 이해관계 조정 장치가 병행되어야 할 대목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협력형 VC 시스템이 ‘뉴노멀’로 자리잡았다. 미국은 엔젤-VC-프라이빗에쿼티-기업 인수까지 벤처밸리 체계가 유기적으로 분화된 생태계다. 한국은 아직 VC, CVC, 액셀러레이터 사이 벽이 높아 오픈이노베이션 확산에는 추가 제도 개편이 요청된다. 현장선 자발적 딜 협력 경험이 누적되면서, 장기적으론 국내 스타트업 성장 전주기에 건전한 투자 인프라가 심화될 수 있다. 투자 시장 환경이 급변하는 시점이다. 단기 수익만 좇는 무리한 경쟁이 아니라, 효과적인 연대와 신뢰 네트워크 구축이 시장 생존과 혁신의 본질임을 VC 업계는 확인 중이다.
— 박희정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