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고, 흔적 남기다: 출판사 대표도 반한 서재의 새로운 자유
책장을 넘기며 한 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손끝에는 늘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한다. 깨끗하게 읽으라는 강박에 갇혀, 감탄도 고민도 토막난 메모조차 남기길 꺼렸던 독서 풍경. 그러나 이제, 밑줄을 그리고 작은 낙서를 남기는 이들이 다시 늘고 있다. 서울의 한 출판사 대표 박정민 씨마저 “책에 자신의 흔적을 입혀가는 일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한다. 오래된 친구와 다시 손을 잡은 듯, 출판계에도 ‘낙서’에 대한 담론이 새롭게 살아난다.
최근 몇 년 사이 온라인 서점에서 ‘밑줄 친 흔적’을 공유하는 리뷰 문화가 번졌다. SNS 해시태그에는 ‘#읽다남김’, ‘#책밑줄’, ‘#나의밑줄’ 같은 키워드가 무수히 쏟아진다. 젊은 층은 연필로 귀퉁이에 생각을 적고, 유화처럼 색색의 마커를 칠해 공유한다. 책‧독서라는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행위에 나만의 이야기를 새긴다는 것. ‘책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금기보다는 ‘내가 만난 세계’에 흔적을 남기려는 욕망이 더 크다.
유럽에서는 애초부터 낙서가 문화였다. 영미권 중고서점에는 타인의 메모, 밑줄, 심지어 편지가 끼워져 있는 책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한국은 좀 달랐다. 국어 교과서에 이름 쓰는 것도 눈치를 봤고, 도서관의 깨끗한 종이를 예의라 믿었다. 하지만 ‘기록하는 독서’라는 문구가 힙하게 떠오르고 있다. 매거진 B 같은 젊은 감성 출판물, 독립 서점에서 흔적 책방을 내세우기도 한다. ‘밑줄 긋기’ 워크숍, ‘독서 흔적 전시회’, 중고책에 기록이 남아 있는 상품의 가치가 오히려 오르는 현상까지 보인다.
박정민 대표는 “책에서는 남의 글로 나를 발견한다. 밑줄 하나, 낙서 하나가 바로 나의 목소리이자 흔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경영하는 출판사도 ‘기록 가능한 책’을 제작, 여백을 넓히고 밑줄 공간을 삽입했다. 이는 텍스트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자와 저자가 선을 넘나들며 교감을 완성하는 문화를 반영한다. 책에 글씨를 남기는 순간, 독서가 더 이상 침묵의 행위가 아닌, 두 주체의 상호작용이 된다.
출판계의 시장 분석도 이를 뒷받침한다. 예스24, 교보문고 등 대형 서점이 밝힌 통계에 따르면 2026년 들어 독서 노트, 플래너형 책 판매가 2년 만에 30% 가까이 급성장했다. 자투리 페이지와 밑줄 친 흔적이 내포된 독자 맞춤형 서적들도 반응이 뜨겁다. ‘하이라이트 공유’, ‘내 밑줄 인증’ 콘텐츠는 플랫폼 트렌드에서 중고생과 20대의 적극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런 흐름은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역설과도 맞닿아 있다. 모든 것이 흔적 없이 흘러가는 스크롤의 세계에서, 종이책이라는 아날로그 미디어에 나만의 상념을 각인한다는 것은 한없이 인간적이고 사적인 저항이다. 화면을 터치하듯 메모하는 이노트도 있지만, 실제로 손으로 끄적이는 촉감과 그 기억은 디지털 복제본이 대체하지 못하는 감성이다.
물론 이 변화에는 ‘책 신성시’ 사고와 충돌이 존재한다. 학교 도서관, 대여점 등 다수가 공유하는 책에 남은 흔적을 ‘훼손’ ‘예의 없음’으로 보는 시각도 여전하다. 그러나 독자가 남긴 낙서와 밑줄이 때론 또다른 메시지가 되듯, 엄격한 도서 사용 규약도 변화하는 문화적 흐름 속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균열 되고 있다. 출판사들은 독서 기록용 엽서, 전용 연필까지 아예 패키지로 판매하며 ‘합법적’ 낙서의 새로운 산업도 만들고 있다.
눈길을 끄는 점은, 밑줄 쫙에 담긴 정서가 세대이탈과 반항이 아니라, 애착의 표식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다. 고단한 하루 끝 누군가의 베갯머리말처럼, 내가 남긴 구절들은 내일의 나와 다시 공명한다. 책을 사서 신중하게 필름을 벗기고 펜을 꺼내는 작은 의식, 기억의 경계에 깃든 용기, 꼭꼭 눌러 쓴 짤막한 코멘트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가 된다. ‘금단의 영역’이 열린 지금, 우리는 책을 통해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본다.
나의 흔적이 깃든 한 권의 책은 결코 단순한 물체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을 다시 닮아가는 또다른 텍스트가 된다. 밑줄 하나, 작은 낙서 하나가 공허의 시대에 내 존재의 작은 외침이 되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의미가 된다. 변화하는 시대, 우리는 자신만의 책, 자신만의 기록법을 다시 꿈꾼다. 밤하늘에 별처럼, 기억의 책장 위로 밑줄이 번진다.
— 정다인 ([email protected])


ㅋㅋ 요즘엔 책에 낙서가 개성이라는데… 저도 옛날엔 교과서에 각종 밑줄, 풀이 댓글, 심지어 사생결단 퀴즈까지 남겼었죠🤣 근데 남의 흔적이 은근히 재밌더라구요. 이런 문화가 더 퍼지면 독서도 살아날까요? 궁금하네요ㅋㅋ 진짜 추억 돋는 기사에요.
나도 책에다 한 줄 남기고 싶긴 함. 근데 솔직히 중고로 팔려고 아낀다 ㅋ
솔직히 이런 게 멋있다는 건 알겠는데, 정작 내 책은 헐값될까봐 손떨려서 펜 못댐. 다들 용감하네!! 진짜로 기억 남긴다는 거 쉽지 않지. 그래도 언젠간 꼭 내 흔적으로 가득 채운 책장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구.
밑줄 긋는 독서법, 예전부터 영미권에서는 꽤 범용적이었죠. 국내에도 도입된 건 반갑지만, 밑줄 문화 확산이 독서의 본질적인 목적(이해와 사유)에 어떤 영향을 줄지 논의가 필요합니다. 기록 그 이상의 사유, 그걸 독려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길 기대합니다.
밑줄… 요즘감성 인정합니다😊
글케 밑줄치다가 내용 놓치는 사람 한둘 아님!! 밑줄도 정도껏 해야 책이 산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