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백서’: 황사영, 시대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부터 부활하다
바싹 마른 한지 위에 흐려진 잉크 자국처럼,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름들이 있다. 그중 ‘황사영’은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별처럼, 오랜 세월 침묵을 견뎌온 인물이다. 그리고 지금, 소설가 이상훈이 역사소설 『백서』를 통해 묻혀버린 비극적 주인공 황사영의 이야기를 다시 세상에 불러냈다. 구름 사이에 잠깐 스친 한 줄기 빛처럼, 세기의 문턱에서 125년 만에 교황에게 보내졌던 편지가 조용히 공개되며 한국 가톨릭과 근대사의 오래된 슬픔과 열망을 새롭게 비추기 시작했다.
황사영—목숨과 신념, 그리고 편지. 어린 시절 역사 교과서의 몇 줄 옆에 조용히 붙어 있던 그의 이름은 이상훈 작가의 손길 아래 낡고 진부한 기념물이 아니라, 가슴을 적시는 인간의 판타지로 다시 태어난다. 1801년 신유박해, 그 찢긴 전란의 한가운데에서 청년 황사영은 죽음과 신앙, 조국의 이미와 근대라는 거대한 격랑에 휩쓸린다. 이상훈의 필치는 촉촉이 젖은 기억을 수채처럼 번져내며,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고통, 시대의 물비늘을 촘촘하게 엮어낸다. 황사영이 교황에게 보낸 긴급한 담판, 마치 어둠을 뚫고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란 간절한 구조 신호처럼 읽힌다.
문학은 종종 역사가 주지 못한 숨소리를, 세상이 주목하지 못한 표정을 복원하는 예술이다. 『백서』는 문헌이나 교과서가 아닌, 한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시작해 거대한 시대와 맞서 싸웠던 영혼의 궤적을 좇는다. 과거의 편지—곧 한 조각 한지 위에 꼼꼼히 새겼던 그의 결기와 회한—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황사영은 과연 구원받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차원의 오해와 왜곡 속에 또다시 감춰진 존재로 남았는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죽음을 앞둔 황사영이 어두운 감옥에서 마지막 생의 기록을 써내려가는 대목이다. 딱딱한 바닥에 조용히 웅크린 채로 그는 오랜 친구와도 같은 교황과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는 시간의 벽을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이야기, 민초들의 침묵, 그리고 당시 조선이 겪은 거대한 시대적 전환을 질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질문 앞에서 송곳처럼 아파진다. 오지 않는 답장, 그러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응답의 기다림. 그 황량한 공간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든 역사의 한 조각이다.
‘백서’에서 재현되는 황사영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열정에 찬 선교사, 제도와 신념 사이에서 갈라진 지식인,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모든 두려움을 털어낸 순수한 인간. 이 모호한 경계선 위에서 이상훈 작가는 섬세하고도 절제된 묘사, 때때로 터져나오는 감성적 선율, 그리고 미묘하게 번져드는 은유로 인물 내면을 파고든다. 역사가 남긴 황사영에 대한 단편적인 선명함과는 다르게, 소설은 오히려 흐릿함 속에서 진실이 스며드는 찰나를 붙잡는다. 그의 절망과 고독, 결단과 후회는 독자들에게 직선적인 평가를 거부하게 만든다.
이 소설의 진짜 힘은 시대의 무게와 인간의 결코 단순하지 않은 내면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서늘한 아름다움에 있다. 잊힌 이름, 사라진 편지, 그러나 운명처럼 되풀이되는 질문들. 황사영은 19세기 조선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남긴 말 없는 울림은 오늘, 나의 작은 방 안에서도, 누군가의 조용한 서재나 성당 한구석에서도 살아 숨쉬고 있다. 125년 만에 다시 공개된 교황 편지는 역사의 무거운 침묵을 깬다. 이상훈이 ‘백서’에서 보여준 건 단순히 한 인물의 드라마가 아니라, 이 땅을 사는 우리가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한 ‘왜’라는 근원의 의문이다.
혹자는 ‘역사소설’의 경계를 따진다. 기록에 없는 상상, 상상과 감정에 적당히 젖은 진실. 하지만 이상훈의 ‘백서’가 보여주는 건 사실과 허구의 이분법이 아니라 이 땅의 아픈 시간에 로맨스를 입히고, 동시에 그 로맨스를 먼지처럼 날리는 잔인한 서정 그 자체다. 황사영의 목소리가 재현되는 순간, 우리는 그 가까이에 있던 이국의 침묵, 시대의 응답없는 신호, 그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촉촉이 젖게 된다.
이상훈 스스로도 ‘백서’를 통해 “묻혀온 이름들이 오늘 누군가의 기억 안으로 되살아나길 바란다”고 피력했다. 백여 년을 뛰어넘어, 이제 이 편지는 단순히 신자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문학은 잊힌 역사의 벽을 깨는 그 첫 번째 망치가 된 셈이다. 황사영의 눈물은 여전히 말이 없지만, 그 말없는 울림이 오늘의 책장 위에서 조용히 파문을 일으킨다. 잊혀진 이름, 백서 속 새하얀 이야기. 우리는 그 절정의 감정 앞에, 잠시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었다.
— 정다인 ([email protected])


이런 이야기 재밌네ㅋㅋ 역사도 결국 스토리임
이런 이야기…더 알려져야죠…
역사책 안봐도 소설에서 다 나오네ㅋㅋ 근데 교황이랑 편지 주고받는 거 실화?ㅋㅋ
실화냐… 역사에 이런 에피소드 진짜 많다니
역사…생각할 거리 주네요🤔
새로운 시각👍 꼭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