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과학] 늘어난 수명, 길어진 병치레 — 장수를 위한 새 과제
박씨(76)는 퇴직 후 손주들과 놀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무릎 통증과 당뇨약 복용으로 낙이 줄었다고 말한다.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전 덕에 그는 ‘100세 인생’ 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어쩐지 활력 넘치는 노년과 거리가 멀다. 잠시 생각을 멈춰, 이웃 어르신을 떠올리면 그 얼굴에 오랜 병세에서 오는 고단함이 번져 있음을 느낀다. 오늘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수명이 84.5세(2026년)로 또다시 갱신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지표가 있다. 각종 질환을 앓거나, 일상생활이 힘들어진 ‘유병 기간’은 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통계청이 내놓은 최신 수치는 2016년 대비 유병기간이 최대 23%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오래 사는 대신, 더 오래 아픈 것이다.
무엇이 우리 노년의 풍경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까. 필자의 개업의 지인도 “심근경색, 뇌졸중 등 그전엔 치명적이던 병을 버텨내는 환자가 확실히 늘었다. 그런데 완연한 회복은 어렵다”며, 의료기술의 양날을 실감한다. 말기신부전, 암 생존율은 꾸준히 오르는 대신 환우들의 투병 기간 역시 길어졌다. 아픈 기간의 증가는 수치로만 보일 수 있지만, 사회적·개인적 울림이 크다. 부모님을 돌보는 40대 A씨는 “오래 사시는 건 감사하지만, 몇 년째 병원과 집만 오가니 가족 모두 지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합병증의 만연, 만성질환 유병률 증가’로 진단한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노인 인구가 늘수록 ‘건강수명’의 중요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배경이다.
백세시대,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장수의 그늘에 직면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자. 한국인은 세계에서 손꼽히게 오래 살지만,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간은 평균보다 짧다. “나라에서 주는 임플란트, 인공관절 시술권도 언젠가 컷이 오지 않을까요”라는 한 노인의 말엔, 숫자로는 읽히지 않는 무거움이 담겨 있다. 비용 역시 문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만성질환과 퇴행성질환 환자 진료비가 최근 10년 새 2.1배 뛰었다고 발표했다. 누군가에게는 치료비 때문에 노후 생활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모든 문제는 어느덧 평범한 이웃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정책 현장도 바쁘다. 정부는 의료·복지 서비스 확충, 노인 운동센터, 실버케어 로봇 보급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현장 간호사는 “프로그램은 늘었지만, 정작 사람 손길은 더 부족하다. 혼자 사는 노인은 약 타러 나오는 걸로 외출이 끝이다”고 토로한다. 이 짧은 일화들이 곧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건강수명을 늘리려면 단순히 치료만이 답이 아니다. 70대 김씨는 매일 아침 텃밭을 일궈 작은 모임을 이어간다. “덕분에 아픈 것도 깜빡한다”는 그의 웃음에는, 일상 속의 운동과 교류가 의학만큼 큰 힘이 되리란 진심이 담겼다.
지난해 영국 보건부는 만성질환 예방 정책을 전면에 내걸었다. 단 칼로 당뇨·비만 예방의제를 강화하자 기대수명 상승의 정체가 곧 건강수명 증대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한국은 아직 ‘병 없이 사는 노년’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걸음마 단계다. 복지국가의 진정한 척도란 어찌 보면,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얼마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지 모른다. 지역사회 내 실질적 거점, 보건소의 역할 강화, 고령층 대상 맞춤형 예방 캠페인 확산이 시급하다. 적절한 운동, 삶의 활력, 정서적 동행이 어르신들에게 꼭 필요하다.
시대의 변화를 숫자 너머 사람의 얼굴에서 읽는다면, 오늘 이 기사에 적힌 ‘늘어난 유병 기간’ 네 글자가 결코 행간에 묻혀선 안 될 것이다. 더 긴 생애, 더 깊어진 병의 골짜기. 하지만 돌봄과 예방, 사회적 연대라는 오랜 가치만이 우리에게 환한 100세 인생을 선물할 수 있다. 작은 변화들이 모여 건강수명이 긴 대한민국이 되길 바란다.
— 김민재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