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틈, 폭력의 그림자: 3년간 501건 살인·미수에 숨은 가정·교제의 슬픔
2026년 9월, 경찰청이 밝힌 통계는 우리 사회 깊은 그림자를 드러낸다. 지난 3년 6개월간 애인·부부 등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한 ‘관계성 범죄’에 의해 빚어진 살인과 살인미수 사건이 무려 501건이었다. 하루 평균 약 0.4건, 무수한 가족과 연인, 친구의 얼굴 너머, 억누른 위기가 터져 나온 수치다. 그 중 상당수는 우리가 흔히 듣는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의 모습을 띠었다. 한창 성장하는 딸을 키우는 윤정희 씨(4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연애 상대도, 가족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닌 세상이라니 두렵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 곳곳에서 반복되는 ‘내 집, 내 곁’에서의 살인의 파장. 부산 마지막 새벽,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아내를 찌르고, 서울의 한 빌라에선 헤어진 연인이 집앞까지 찾아가 자해 난동을 부리며 목숨을 위협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이들이었고, 서로의 아픔과 고단함, 상처를 모른 척한 채 시간이 흘렀던 사람들이다. 현장을 다니며 인터뷰를 하면, 피해자들은 늘 말했다. “가족이라서, 믿는 사이여서, 처음엔 그럴 수 있겠지 생각했다”라고.
경찰관계자가 밝히길, 이들 관계성 범죄는 피해자의 70%에서 반복적으로 폭력이 누적되어 온 흔적이 발견되고, 30%는 가해자가 범행 전 분노 조절 장애나 우울증, 알코올 의존 등 정신적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이정훈(37세, 가족상담사) 씨가 상담실에서 만난 한 아버지의 눈물과도 맞닿아 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냐 묻지만, 가정 안에서 오랜 시간 쌓인 분노와 좌절이 야생동물처럼 터져버린다”고 진단한다.
통계는 늘 숫자지만, 그 속에 쌓인 가족과 연인, 친구들의 이야기는 결코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대전에서 20년 넘게 가정폭력 쉼터를 운영하는 박태영(55세) 원장은 “살인, 살인미수까지 간 건 피해자가 구조 신호를 계속 보냈지만, 이 사회가 번번이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실제 피해자들의 1/3은 이미 경찰에 한 차례 이상 도움을 요청했고, 그 중 일부만이 긴급 임시조치나 임시 보호소로 이송됐다. 연락 두절과 침묵, 자책감, 그리고 반복되는 가해자의 협박 속에 많은 이들이 결국 극단의 선택이나 참혹한 범죄로 밀려갔다.
문제는 이런 일이 절대 ‘특정한 집’이나 일부 연인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년층까지 교제폭력 피해가 급격히 늘며, 온라인상에서는 “연애조차 고통이다”, “결혼이 무섭다는 친구가 많다”는 자조가 끊이지 않는다. 관계의 붕괴와 미세한 불신, 나아가 경제적·정서적 불안이 사회 전체에 폭력의 뇌관을 무기물처럼 숨겨놓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2026년 상반기에는 교제폭력 범죄 신고가 전년 동기 대비 35% 증가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건, 경찰과 행정당국의 ‘사후’ 대응을 넘어 ‘사전’의 예방이 과연 실효성 있게 작동하는지 여부다. 현행법은 폭력이 반복된 경우 임시 조치나 접근금지를 내릴 수 있으나, 여전히 현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할 인력과 지원책, 피해자가 보호시설에 머무른 후의 사회적 재정착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맞벌이, 한부모, 청년 1인가구 등 다양한 가족형태가 확산된 현실에서 ‘기존 틀’로 다룰 수 없는 범주가 많다.
가해자 교정·치유 프로그램 역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온다. 2025년 기준으로 전국적으로 분노조절 프로그램 이수자는 900명이 넘었으나, 이수 후 재범률은 28%에 달했다. “교육 받고도 현실로 돌아가면 또 예전 행동으로 돌아가요. 경제난, 직장문제, 가족갈등까지 다시 덮치니까요.” 한 프로그램 담당자의 토로다. 거기에다 근본적인 젠더 문제, 가부장문화에 기반한 ‘소유로서의 관계’ 인식 역시 아직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이처럼 사건 뒤에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과, 우리 모두의 무관심이 낳은 집단적 책임이 있다. 이웃으로, 친구로, 동료로 곁을 돌아봐야 쌓여가는 압력을 분산할 수 있음을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상담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누가 내 이야기 먼저 들어줬더라면, 한 번만 크게 도와줬더라면 이런 결말은 아니었을 것”이라 후회한다.
‘관계성 범죄’라는 낯설면서도 가장 가까운 이름의 폭력. 마주하는 모든 장면마다,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질문이 겹겹이 쌓여간다. 관계가 더 이상 안전망이 아닌 위기의 진원지가 되었을 때, 법과 제도 못지않게 우리 공동체의 공감·연대·실행이 시급하다. 엄마와 딸, 사랑하는 이, 친구-그 누구도 내 곁이 내 목숨을 위협하는 불안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오늘도 우리는 더 많은 대화와 지지, 그리고 실질적인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 김민재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