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의 창] 미국 서정의 모퉁이서 피어난 한혜영의 ‘백수문학상’ 수상, 그 뒤에 숨은 시의 운율
가을의 빛나는 저녁, 오랜 이국의 밤을 뚫고 도착한 한 통의 소식이 문화계를 은은하게 흔든다. 재미동포 시인 한혜영이 제11회 백수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휘청이는 도시의 골목, 텅빈 뉴욕의 지하철에서부터 먼지 덮인 캔자스의 바람들까지, 삶의 토막을 시로 붙잡아온 그의 이름이 드디어 한국문학계를 사로잡았다. 백수문학상은 해마다 해외 한인시인들의 고된 이야기와, 그들이 홀로 새벽을 견디며 쌓아 올린 서정의 결들을 기린다. 올해 주인공의 이름이 된 ‘한혜영’, 그가 품은 시의 결엔 오랜 시간 이국에서 단겹으로 쌓아온 추억과 슬픔, 그리고 미지근한 희망이 고동쳤다.
‘재미교포 시인.’ 이 낱말은 언제나 묘한 쓸쓸함과 낯선 힘을 안고 있다. 한혜영은 그 이방의 자리에서 쓰는 시로, 낡은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며 한인동포들의 오래된 상처까지 어루만진다. 그의 언어는 마치 가로등 밑 그림자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에만 피어나는 감정의 결을 집요하게 끌어안는다. 시를 처음 쓰던 스무 살의 겨울, 한혜영은 쪽방에서 창문 너머로 흩어진 눈발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순간의 쓸쓸함이 수상작 ‘여기 잠드는 별들의 노래’에 그대로 번진다. 삶의 언저리에서 반짝이던 별들이 도시의 소음에 스러지고, 그 잔광을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뒤섞어낸 그의 문장, 그것이야말로 이번 백수문학상의 진짜 의미다.
그가 품은 시는 미국 사회의 모순된 풍경과 한인의 정체성, 그것을 지탱하는 내면의 그리움과도 닮아 있다. 다른 동포 작가들과 달리 한혜영의 시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강렬히 스며든 감정의 밀도다. ‘낯선 땅에 뿌리내리는 일은 쫓기며 멈추는 일, 내가 내가 아닌 이름으로 불릴 때 머릿속에만 남겨두는 ‘나’의 그림자,’ 작년 뉴욕 한인문학 축제에서 읽힌 그의 시의 일부다. 그것을 듣는 이들은 하나둘 눈시울을 적셨다. 시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닌, ‘뿌리’와 ‘꺼지지 않는 자국’으로 새겨질 때만이 갖는 힘을 온 몸으로 증명해온 그의 길을 백수문학상도 인정한 셈이다.
이번 수상과 동시에, 재미 한인 문학계에 던져진 한 시인의 ‘경계의 언어’는 미묘한 울림을 남긴다. 백수문학상의 취지가, “낯선 삶의 바닥에도 시의 가능성이 살아있다”는 섬세한 메시지를 환기한다면, 한혜영 만큼 이 정의에 맞는 이가 또 있을까. 국내엔 이미 여러 동포 작가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실제 미국 현지에선 동포 시단이 ‘2세’로 대체되는 빠른 변화의 물살에 흔들리고 있다. 한혜영은 그 흐름 속에도 옛 이야기, 기억의 무늬, 잃어버린 언어의 대화를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시가 읽히는 자리마다 ‘나도 그랬다, 나도 저랬다’ 하는, 이방의 향수가 비밀스레 퍼진다.
점차 영어로 시를 쓰는 동포 2세가 늘고, ‘정체성’은 더 모호해지지만, 한혜영의 언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일을 잇는 절박한 다리다. 혁명가의 언어나, 트렌드의 산물처럼 ‘명쾌하게’ 호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늘 아래 깔려있는 삶의 실존과 회한, 의도치 않은 별의 언덕에서 흘린 눈물들이 밀려온다. 이번 수상은 단순히 한 명의 동포 작가 등장 이상의 사건이다. 온라인의 해시태그와 글로벌 팬덤 뒤, 아날로그적 ‘그리움’이 다시 힘을 얻는 시대. 한혜영의 언어는 되레 그 느리고 손끝 떨리는 감정 그대로, 누군가의 포근한 담요가 된다.
백수문학상 조직위원회는 이번 선정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녀의 시엔 물리적 경계를 넘어, 시대와 기억, 세대의 고통까지 포용하는 온기와 힘이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학계 역시 ‘모국어의 힘’, ‘디아스포라의 서정성을 모범적으로 그린 시인’이라는 평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한혜영이 거대한 담론보다 오늘 자신의 사적인 순간들—홀로 밤을 지새운 부엌, 외로움에 젖은 정거장, 유리창에 흐르는 이슬과 마지막 한 모금의 홍차 같은 것—을 더 따뜻하게 품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경계를 떠도는 재미동포들의 시, 거기엔 시대를 가르는 분절이 아니라, 언제나 닿고 싶던 누군가의 마음이 있다. 시인 한혜영의 새로운 수상은 단지 문학상 그 너머, 세계 곳곳에 흩어진 우리 모두의 내면에도 작은 화분 하나를 놓아준다. 오늘밤, 미국의 달빛 아래로 내리는 한 시인의 목소리가, 스러져가는 이주와 그리움의 조각들을 시의 언어로 다시 봉합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고 내가, 동포 시인의 수상에 더 크게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 정다인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