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평 일색’의 그늘, 나홍진을 둘러싼 환상과 실체

밤이 내려앉은 브루클린의 오래된 영화관. 낡은 극장 의자 사이로 바람이 스며든다. 그곳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시선은 한 켠의 스크린을 향해 매달려 있다. 스크린 속, 낯설고 기이한 한국적 풍경이 펼쳐진다. 이 풍경의 연출자는 바로 나홍진 감독. 미국에서 쏟아지는 ‘호평’, 그 찬란한 지평선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흐르고 있을까.

최근 북미 영화제 현장에서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와 찬사가 연일 미디어 지면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호평의 열기에 감춰진 또 다른 목소리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LA타임스, 버라이어티, 인디와이어 등 미국 유력 매체들은 그의 작품을 두고 ‘한국적 신화와 공포가 국제적 언어로 소화됐다’며 상찬한다. 특히 ‘곡성’ 이후, 미국 내 한국 스릴러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장르의 경계 파괴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하지만, 무릇 광채가 더 밝을 때 그림자 또한 뚜렷하기 마련이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 세계는 언제나 모호함 위를 부유한다. 선과 악, 진실과 오해, 전통과 현대, 신념과 광기. 그의 화면에서는 이 모두가 한데 섞여, 익숙함 사이로 불안을 심는다. ‘추격자’의 질주, ‘황해’의 상흔, 그리고 결국 ‘곡성’의 기괴함과 무력감. 한국에서는 이 ‘불편한 미장센’을 두고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으니, 서구 비평가들은 오히려 이 낯설음에 열광했다. 익숙함이 배반당하는 그 순간의 미학을, 할리우드식 내러티브의 허깨비를 뒤흔드는 힘으로 읽어낸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영화는 미국 관객 대중에게까지 폭넓게 스며든 적이 있었던가? 아니, 오히려 ‘아시아적 타자화’와 유럽영화제식 ‘이국적 키치’의 대상이 아니었나 하는 냉정한 질문이 남는다.

여전히 현실과 환상의 어딘가에서, 나홍진의 이름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미국 언론들은 “아시아 호러의 신경을 건드린다”, “낯선 불안감의 연출” 등 자극적인 문장으로 호평을 쏟아낸다. 그러나 작품 자체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까? 문화적 간극을 건너뛴 평가 속, 그 지점에는 ‘이해한 듯 이해하지 못한’ 서구인의 시선이 엿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내 젊은 평론가들조차 “선택적 환상과 오해”라는 지적을 서슴없이 던진다. 곡성의 결말에 얽힌 무수한 해석과, 정체불명의 공포가 번지는 깊은 밤을 서양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알 수 없음과 두려움, 내면의 불안을 촘촘히 직조하는 그의 손길이, 오히려 미국적 공포문법 밖에 놓이는 순간조차 많았다.

영화를 향한 찬사는 이따금 과장된다. 유럽영화제에서 권위를 얻고, 북미 미디어에서 상찬을 받는 모든 작품이 곧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에이미 타일러 LA타임스 평론가는 최근 “나홍진의 서술은 신선하고 기괴하다. 그러나 그 불친절한 결말은 미국 대중에겐 여전히 해석의 과제”라 평했다. 익숙한 도식과 클리셰를 경계하고, 의도적으로 여운을 남기는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오히려 대중성과는 거리를 둔 채 남겨진다. ‘호평 일색’이라는 수식 뒤에는, 한류의 신화와 현실, 그리고 작가 개인의 고유한 결이 구분 없이 뒤엉켜 있었다.

나홍진 효과, 미국을 흔드는 새로운 파동인가, 아시아적 타자화를 소비하는 익숙한 방식의 반복일 뿐인가. 그 답은 쉽게 내릴 수 없다. 그의 영화에 깃든 짙은 어둠과 미지, 그리고 바로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미세한 진동들이야말로, 이 시대 한국 영화가 세계와 나누는 가장 서늘한 대화임을 다시금 새긴다. 세계로 건너간 작가와 작품을 향한 호평의 강물은, 실은 오리무중의 안개를 따라 천천히 흐른다. 명확하게 보인다고 믿는 순간, 더욱 아득해지는 나홍진의 세계처럼.

— 정다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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