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아버지이자 어른”…정순택 대주교도 故최불암 애도

최불암, 그의 이름만으로도 수십 년간 이 나라의 가슴 한복판에서 울려 퍼져왔던 가장의 의미가 아른거린다. 2026년 10월, 이 시대 ‘아버지’의 상징이자 대중문화와 공동체 생활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배우 최불암이 세상을 떠났다. 정순택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주교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공식적으로 조의를 표했지만, 담론은 그 이상의 질문을 남긴다. 왜 우리는 이토록 한 명의 ‘어른’을 상실하는 순간마다 사회적 슬픔과 결핍을 동시에 체감하는가?

일반 대중이 아는 최불암의 표면은 탁월한 연기자이자, ‘국민 아버지’다. <전원일기>의 ‘최부장’으로 대표되는 소시민 가장의 미학, 삶의 근면, 남루하지만 따뜻하게 가족을 보듬는 태도. 그러나 그가 연기의 옷을 벗어도, 남는 것은 가족과 공동체에 헌신하는 일관된 태도다. 한국문화예술계 원로로서, 또 사회 약자를 대변하는 수많은 기부와 봉사, 조용한 사회활동은 복수의 기사와 내부 증언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연기자로서는 이미 국민으로부터 ‘생활연기’라는 단어를 선물 받았고, 그 행보는 동시대 연예인들도 상업성, 화제성 너머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게 만드는 준거점이었다.

최불암의 별세 소식에 천주교계가 애도를 표하는 것은 단순한 예우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정순택 대주교, ‘우리 사회의 아버지이자 어른’. 대주교 스스로 말한 ‘어른’이란 무엇인가. 투명하지 못한 리더십, 청년 세대 소외와 단절에 관한 지적이 일상화된 오늘날, ‘어른’의 상실은 곧 사회적 가이드라인의 붕괴와 직결된다. 동시에, 어른으로 남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허덕이고 왜소해졌는지도 민낯으로 드러난다. 최불암은 대중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담백한 가치’를 구현한 세대의 마지막 인물 중 하나다. 면밀하게 뜯어보면, 이런 상징의 상실은 곧 우리 집단의 취약성과 맞닿아 있다.

서구 사회는 한 명의 ‘국민 배우’ 상실 시, 그 공백을 인물·제도·학교·공적 담론이 잇지만, 한국은 공동체적 인식 구조상 이를 대체할 구심점이 자주 부재하다. 특히 2020년대 중반부터드러난 ‘사회적 어른의 부재’, ‘도덕적 리더십 실종’ 문제는 코로나19 이후 사회단절·취약계층 소외의 가속과도 부분적으로 맥락을 같이 한다. 최불암이 상징했던 아날로그적 인간관계, ‘나눔의 미덕’은 팬덤·빨리빨리 문화, 디지털 미디어와 힘의 경쟁에 짓눌리며 점차 자취를 감췄다. SNS·커뮤니티 여론에서도 그의 사망 소식이 ‘가족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오랜 시간 기자·시민·전문가들이 경계했던 가치의 해체, 그 현장 체감이 생생하다.

흔히 내부고발 구조를 설명할 때, 조직 내 침묵·도덕적 해이에 대한 마지막 경계선은 ‘작은 어른’들이 지킨다고 본다. 최불암, 그는 예능인이 아니었다. 연기든, 미담이든, 소외된 이웃을 위한 활동이든, 자기 이름이 아니라 결과로 사회적 신뢰를 쌓았다. 기사 외 여러 보도와 증언에 따르면, 그는 조용한 기부와 약자 보호에 앞장서면서도 언론 공개를 꺼렸고, 대중의 응원에 민망해했다. 이 점에서 그가 실천해온 윤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질적 예이며, 도로변 광고에 소비되는 유명인의 환상이 아닌, 현장에서 사회문제 해결의 리더십을 보인 사례로 남는다.

‘최불암을 추모한다’는 수사가 일회성 감상이나 복고적 아이콘 소비로 전락해선 안 된다. 정순택 대주교와 천주교계의 애도 메시지는 의례적 언어 같지만, 실제론 우리 사회에 ‘어른다운 역할, 상실된 가이드, 소외계층 포용, 공동체적 책임’이라는 숙제를 남긴다. 수많은 덕담과 호평 속에서 실질적 어른의 사회참여, 세대 간 신뢰회복, 복잡계 사회에서의 역할 복원까지 구체적 실천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목소리가 커져야 한다.

과연 우리는 또 다른 최불암을 기억하는 데만 머물 것인가, 아니면 그의 빈자리에 책임과 의미를 덧입혀 시대가 요구하는 어른을 다시 설계할 것인가. 미디어와 사회 모두 최불암이라는 집단기억을 어떻게 전유할지, 애도 이후가 더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다.

— 송예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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