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트렌드는 없다”…카루소, 패션을 비틀다

2026년 가을, 패션계는 이례적으로 조용한 파동을 타고 있다. 밀라노 패션위크를 통해 공개된 카루소(CARUSO)의 신작 컬렉션이 그 중심에 섰다. “새로운 트렌드는 없다.” 이 한마디로 정의된 이번 쇼는, 화려한 혁신이나 주목받을 만한 신상 대신 기존의 규칙을 뒤흔드는 미묘한 조율에 집중했다. 컨셉은 명확히 ‘비틀기’, 고전적 테일러링에 대한 반전, 편견에 균열을 내는 유머 그리고 당돌한 젠더리스 실루엣. 트렌드 자체가 빠르게 증발하는 시대에, 카루소는 패션이란 정답 없는 게임임을 새삼스럽게 선포한다.

런웨이 위 모델들은 부드러운 캐시미어와 린넨, 자연주의 컬러 팔레트의 슈트 셋업에 느슨하게 묶은 스카프, 고의적으로 벗겨진 턴업 팬츠로 등장했다. 오버사이즈와 슬림핏이 뒤섞인 믹스매치, 의도적으로 무너진 품새와 언밸런스 커팅이 ‘규칙 없는 우아함’을 완성한다. 이 모든 세부는 ‘정석’에 대한 도전이자 부정처럼 읽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십 년 테일러링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구현될 수 없는 완성도다. 카루소답게 결코 가볍지 않은 장난, 그게 바로 2026년 알파카 재킷의 존재 이유다.

다른 패션 브랜드들은 지금 ‘무(無)트렌드’ 시대로의 진입을 강조한다. 구찌, 프라다, 로에베 등 고전 명가도 앞다퉈 타임리스 피스를 내세우고, 뚜렷한 새로운 패턴보다 기존 요소의 재배합에 집중하는 듯하다. 과거의 클래식이, 새로운 의미로 변주되어 귀환하는 구도. 실제 리바이벌이나 빈티지 리오더 붐도 배경이 된다. Z세대가 ‘신상의 새로움’보다 ‘재해석된 익숙함’과 ‘롱런 무드’에 돈을 쓰는 건 더 이상 뉴스거리조차 아니다. 패션계는 지금,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트렌드 없음’이라는 트렌드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번 카루소 쇼가 주목받는 건, ‘기존의 반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런웨이에선 눈에 띄게 과한 디테일이 사라지고, ‘있으나 없는 듯’한 표현과 뻔한 익스테리어 대신 텍스처와 재단선 한 줄로 시선을 끄는 방식이 눈에 띈다. 리얼웨이와 런웨이, 젠더와 에이지의 경계마저 슬며시 허물어진다. 화려한 전위보다, 아주 잔잔한 익살이 청중의 피로감을 녹인다. 세련된 ‘착각’과 무심한 듯한 고집. “옷장에 오래 있어도 유행 뒤처지지 않을 것 같은데, 은근히 튄다”는 반응. 그것이 이번 카루소의 승부수다. 이번 시즌 보여준 그로테스크·오버사이즈 유행과 달리, 섬세하게 해체한 고전미. “익숙하지만 낯선”, “예상 범위 밖에서 미묘하게 흔드는” 기법에 패션피플들의 시선이 모인다.

카루소가 이끌고 있는 이 흐름은 단순 ‘복고’와도 거리가 있다. 빈티지 룩의 재현이 아니라, 과거를 읽어내는 신선한 방법론. 매 시즌을 쏟아붓던 강박적 컬러 플레이 대신 고요한 베이지·그레이·네이비, 그리고 톤온톤 레이어링. 허풍 대신 디테일, 요란함보다 완성도의 미학을 내세운다. 패션 시장을 뜨겁게 달구던 ‘Y2K 복고 대란’의 기세가 약간은 꺾이며, 진짜 테일러링・퀄리티・해체미학으로 이동하는 시점의 미묘한 전환점이다. 국내 신진 디자이너들도 최근 조금씩 이런 흐름을 띄우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 ‘2026 패션 신’의 키워드가 보인다. 짧게 말해 “앞서가지 말고, 잘 비틀자”.

물론 트렌드의 공백이 패션 시장엔 위기와 기회, 두 가지 얼굴을 가져다준다. 브랜드마다 ‘차별화’란 단어를 내세우지만, 정체성이 약하면 순식간에 대중의 기억에서 지워진다는 점도 무시 못한다. 카루소처럼 섬세한 위트를 발휘하거나, 기술과 소재조합에서 승부하지 못하면 ‘무(無)트렌드’ 시대에 살아남기 쉽지 않다. 그마저도 마케팅이 아닌 진짜 내러티브와 완성도로 해석할 수 있어야 통한다.

어쩌면, 패션계가 이토록 ‘트렌드 없음’에 집중하는 건,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대성에 대한 쿨한 항변일지 모른다. “꼭 새로워야만 해?”라는 질문을 내던지는 순간, 오히려 감각적 변주와 주체적 선택의 유희가 열린다. 결국 트렌드란, 지금 이 순간의 욕망을 반영하되 늘 곁에 머물 수는 없는 ‘바람’ 그 자체다. 그래서 이번 카루소 컬렉션은 ‘반(反)트렌드야말로 유일한 진짜 트렌드’라는 역설을 가장 세련되게 보여줬다. 옷장에 조용히 스며들면서도, 남들이 물어보게 만드는 존재감. 2026년의 패션은 거기서 새롭게 시작된다.

— 오라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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