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리뷰] ‘영화는, 이야기의 파도다’…부산이 선물한 8개의 세계
부산의 숨,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해변의 온기 위에 다시 바람이 이는 계절이다. 바다를 품은 도시는 언제나 변하지 않으면서도, 바깥세상의 무수한 꿈을 끌어안는다. 올해로 31회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또 한 번 ‘파도’처럼 밀려온다. 각기 다른 색, 온도, 향기를 지닌 영화들이 부산을 스쳐가며 8개의 세계를 선물했다. 매년 같은 장소, 그러나 새로운 감동이 쏟아지는 부산은 단순한 축제의 공간이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현재이자 미래다. 구름 끼인 하늘 아래 열리는 이 영화제는,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일상의 바다 위에 쏟아진 ‘이야기의 파도’였다.
‘이야기의 파도’. 그 말엔 힘이 있다. 영화는 원래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이는 물살이다. 거기엔 익숙한 사랑, 낯선 상실, 다시 시작되는 용기, 고요한 슬픔이 교차한다. 회를 거듭할수록 부산은 단지 상영관이 아니라, 인생을 나누는 플랫폼이 되어버렸다. 올해 선보인 8편의 주요 화제작들도, 장르와 국적을 넘어 자신만의 리듬으로 관객을 침식했다. 봉준호 감독의 새로운 단편이 첫 개막작으로 관객을 압도한 가운데, 인디 신에서 떠오르는 신예 감독들은 기성의 파도를 건너 완전히 새로운 해변을 보여주었다. 관객들은 영화의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각자의 파도 위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감쌌다.
올해 BIFF의 테마는 일종의 다원성을 품는다. 코로나19 이후 진짜 영화를 영사기 너머에서, 즉 진짜 ‘관계의 공간’에서 본다는 건 얼마나 설레는 경험인가. OTT 시대에 모두가 각자의 방에서 이야기를 소비할 때, 부산은 모든 사람을 영화관으로 초대한다. 8편의 세계—프랑스, 태국, 이란, 일본, 그리고 한국—는 각기 다른 언어, 다른 얼굴로 꿈과 현실을 실핏줄처럼 오가며 관객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폭넓은 스펙트럼만큼이나 다양성을 지향하는 감독들은 올해도 이방인과 난민, 경계인과 도전가의 이야기로 세상이 품지 못한 곳에 따스한 시선을 건넸다. 각본 없는 삶의 불확실성, 그리고 그 안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까지. 부산은 여전했다. 영화제는, 그저 입구만 새로운 낯선 재미가 있는 곳이 아니라, 모든 이야기가 만나는 온기가 됐다.
잠깐, 영화제의 현장을 걸으며 내내 머릿속을 맴돈 건 바로 ‘이야기 속의 나’였다. 어쩌다보면 시끌벅적한 레드카펫 너머의 빛보다, 칠흑같이 어두운 관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들의 숨결이 더 크고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BIFF는 늘 화려하지만 동시에 은밀하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흘리고, 함께 웃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의 해변에서 나는 숨어 있는 수많은 고백들을 보았다. 사회의 구석구석을 헤집는 젊은 감독의 시선, 노년의 깨달음을 품은 고참 감독의 유연함, 그리고 관객의 시선까지 뒤섞여 바다가 수용하는 모든 흐름처럼 BIFF는 스스로 새로웠다.
산업의 변화도 부산을 덮쳤다. 올해 BIFF는 새로운 파트너로 아시아 신진 자본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영화제가 단순히 상영의 장이 아니라 제작·투자의 허브로 변화하는 조짐을 보였다. 극장가와 OTT 플랫폼의 치열한 경계선, 예술과 상업의 균형, 그리고 변치 않는 것은 단 하나, 결국 ‘사람과 감정의 이야기’ 뿐이라는 점이다. 부산에서 꿈을 꾸는 영화인들, 어디선가 다시 시작되는 길 위의 고독까지—실패와 두려움, 위로와 용기 모두를 겨루며 부산은 또 다른 이야기를 생성한다.
오래 전부터 부산은 ‘바다의 도시’로, 일상과 관계에서 고립된 개인을 달래는 공간이었다. 지금 BIFF는 영화라는 언어로, 그 바다를 또 한 번 채운다. 파도 위에서 만난 8개의 새로운 세계들. 그 안에서 관객들은 더 이상 손수건이자 손짓이자, 어쩌면 마지막 남은 위안이다. 영화는, 이야기의 파도다. 올해 부산이 선물한 이 8개의 세계는, 세상의 외로움을 잠시나마 휘감는 눈부신 위로였다.
빛이 바래지 않는 도시, 그리고 사그라지지 않을 이야기. 부산의 한가운데서 다시금 삶을 껴안은 이 영화제의 기록이, 모두의 마음에 남기를.
— 정다인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