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마저 바쁘긴 싫어요”…’느린 여행’에 빠진 청춘들
활기차게 움직이며 도시의 명소를 몇 시간 단위로 바꿔 가던 여행자의 그림자 뒤에서, 느리게 걷고 소리 없이 경치에 녹아드는 또 다른 여행의 풍경이 조용히 퍼지고 있다. 최근 들어 많은 젊은이들이 빨리빨리를 외치는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여행지에서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오롯이 자기만의 속도를 찾으려 한다. 거창한 버킷 리스트보다 지금 눈앞의 햇살과 바람, 소리마저 하나씩 곱씹으며, 여행에서조차 남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결심이 조용한 트렌드로 확산 중이다.
부산의 골목길에서 혼자 미역국을 끓여 먹는 대학생, 강릉의 평범한 게스트하우스 숙소 창문에 기대 청명한 하루를 천천히 흘려보내는 직장인, 전주의 오래된 찻집에서 종이책 한 권에 푹 빠진 청춘. 그들은 인증샷보다 느린 움직임으로 작은 순간을 누린다. 옆을 스쳐가는 사람들에게는 ‘낭비’처럼 보일 수 있는 시간의 사용. 그러나 각자의 내면에 집중하게 되는 이 느린 여행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한다는 매력을 지닌다.
여행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는 종종 체크리스트를 손에 쥐고 움직인다. 가이드북에 나온 풍경, SNS에서 화려하게 보였던 명소에 일정을 쪼개 방문하고, 아쉽지 않으려 다른 여행자처럼 후기를 남긴다. 하지만, 포화된 디지털 세상처럼 여행풍경 역시 무엇인가를 ‘소비’하는 양상에 갇혀 있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 여행 트렌드는 그런 피로감에서 시작됐다. 빠른 소비가 남긴 허탈함, 자신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맞춰 찍은 여행 사진의 공허함. 점점 더 많은 청춘이 느린 여행을 시도하며 ‘나만의 여행’을 찾는 중이다.
느린 여행의 공간은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조선시대 고택, 해변가 옆 오래된 마을, 철길옆 작은 시골역이나 그 곁의 무심한 바람들이다. 여행자들은 카페 창가 자리에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내려두고, 낯선 땅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본다. 머문다는 행위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 된다. 때로는 평범한 동네 슈퍼에서 산 편의점 음식으로 한 끼를 해결하지만, 평온한 오후 햇살은 익숙했던 음식마저 특별하게 만든다. 그렇게 자기 안의 고요함을 듣는 여행이 자연스럽게 번져나간다.
이렇듯 청년 세대가 택하는 느린 여행은 사회와 세상의 요구에 맞춘 삶을 반복해온 반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년시절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획득’하라고 교육받은 세대는 경력, 자격, 경험 쌓기에도 쉼 없이 달렸다. 그러나 바쁜 일상과 불확실한 미래, 치열한 경쟁에 지친 마음은 ‘느림’이라는 가치에 끌리고 있다. 이들에게 슬로우 트래블은 비용이나 화려한 소비와 무관하다. 또래와의 비교, SNS에서의 뒤처짐에 대한 압박에서도 한발 물러서려는 몸짓이다.
국내 여행업계 역시 달라진 수요에 촉각을 세운 모습이다. 전통적인 여행사 상품이 아닌, 최소한의 일정이나 아예 일정을 넣지 않은 셀프 트래블 패키지, 오래된 기차역이나 소도시 중심의 ‘머무는 여행’이 늘어난 것도 이 같은 흐름에 힘을 싣고 있다. 유명 유튜브 채널이나 트래블 크리에이터 역시 ‘혼자 하루 쉼표 찍기’, ‘5일 동안 한 동네 살기’, ‘조용한 객잔에서의 밤’ 등 느림의 미학을 탐구하는 콘텐츠에 주목한다. 소소한 공간, 낡은 골목, 작고 오래된 물건들이 ‘여기만의 순간, 나만의 기억’으로 여행자의 마음을 데운다.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이미 확고해진 슬로우 트래블의 전통은, 한국에서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서유럽의 슬로우 시티(cittaslow), 일본의 이타미 문화 등 생활 속 머무름의 가치는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다. 국내 소도시들도 대형 테마파크나 관광지가 아닌, 고즈넉한 길과 성실한 동네 상권을 앞세워 잃어버린 여행의 속도를 제안한다. 청춘들은 그곳에서, 느리게 걷거나 오래 앉아 있거나, 깊은 생각 없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가장 자신다운 시간을 회복한다.
길지 않은 젊은 시절, 한때는 여행마저 경쟁과 과시의 장이었던 때를 지나오며, 이제는 나답게 머무르고, 나만의 속도로 여행의 의미를 새긴다. 서로 다른 속도를 인정하고, 함께 있지만 마음대로 쉽게 떠나올 수 있는 곳. 그 자유로움, 그리고 공간의 온기와 소음, 다정한 냄새들은 이 시대 청춘들의 느린 여행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소중해지는 시간. 느린 여행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닌, 숨을 고르며 걸을 수 있는 용기 한 줌일지 모른다.
— 하예린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