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선의 그림책 서평] 찐빵이불, 감성 그리고 소확행의 온기
‘찐빵이불’은 제목만으로도 익숙한 따스함을 불러온다. 오늘날 그림책 시장이 테크놀로지와 어린이 감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지만, 이 작은 책은 한결같은 토닥임을 건넨다. 지상선 작가의 이번 신작은 온기라는 주제를 누구보다 온전히 담아낸 결과다. 아침의 이불을 털며 퍼지는 햇빛, 추운 날 구워내는 찐빵의 훈기, 그 감각들이 익숙한 듯 낯설게 그림 속에서 살아 숨 쉰다.
그림책은 등장인물과 배치, 그리고 색감에 있어 유난히 심플함을 견지한다. 텍스트는 절제됐고, 배경은 최소한의 요소로 채워진다. 그러나 읽는 이가 바라는 모든 온도, 촉감, 소리마저 도드라진다. 이런 점에서 ‘찐빵이불’은 일견 어린이의 시선만을 위한 그림책처럼 보이지만, 실은 현대인의 고단한 마음을 위로하는 ‘복합 온기 매체’라 불러도 무방하다. 작가는 캐릭터보다는 상황 자체의 감각을 직관적 이미지로 전환한다. 색채는 주로 우유빛과 밀가루색 계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백의 미를 고집스럽게 지키며 공간감을 극대화한다. 찐빵의 질감은, 얇게 가라앉은 먹물과 투명 수채화가 레이어처럼 겹쳐진 방식으로 전달되어, 촉각적 환상을 불러온다.
최근 ‘쉴 틈 없는 현실 속 쉼표’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사회에서, <찐빵이불>은 거창한 의미 부여 대신, 일상성의 탐닉을 권한다. ‘큰 메시지’로 치장을 삼가고, 차가운 도시 삶의 표면 아래 숨어있는 미묘한 감정에 한껏 다가선다. 그 배경엔 피로한 현실을 직시하는 직장인, ‘힐링’을 상품으로만 소비하기 지친 부모, 그리고 반짝이는 하루의 한 장면을 붙잡고 싶은 모든 현대인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작가는 군더더기 없는 말투로, 독자 스스로 감정의 배치와 정서를 찾아 떠나도록 유도한다. 기계적 친절이 아닌, 사적인 손길을 건네는 듯한 문장이 의도된 듯하다.
같은 시기 출간된 다른 그림책들과 비교해볼 때, ‘찐빵이불’은 일상성을 가장 전면에 내세운다. 최근 화제가 된 ‘책바늘’이나 ‘붉은 젤리곰의 오후’가 서사, 판타지, 혹은 활동성을 부각했다면, ‘찐빵이불’은 일상적 피로와 편안함의 심플한 공존에 더 집중한다. 이는 현 시대 그림책 트렌드인 화려함과 자극성에 대한 역행이며, 감각의 반복 훈련을 통한 내면의 회복이라는 잊혀진 미덕을 소환한다.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아날로그적 감성, 즉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도의 가치를 복원하는 셈이다. 마치 펜 선 하나, 물감 한 방울까지도 감정을 의도적으로 절제하며 그리는 듯한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속도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배경화면처럼 느릿한 장면 전환, 온기가 녹아드는 찐빵 이불 아래 뭉근한 포근함. 이렇듯 지상선 작가는 어릴 적 겨울집의 기억,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향수를 교차시킨다. 그림책 속 아이와 반려 동물, 그리고 그림자를 이루는 가족의 실루엣은 누구든 자신의 모습으로 투영 가능하다. 이 각색 가능성은 독자의 연령, 직업, 일상과 맞물리며 범용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특히 최근 MZ 세대 부모들이 선호하는 ‘감성 육아’와 ‘아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그림책’ 열풍 속에서, 이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단순히 치유적 메시지가 아니라, 함께 머무는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은근하게 설득한다.
작가 지상선만의 화풍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른 대표작 ‘이불 밖은 위험해’에서도 보여준 ‘느린 채움’ 기법이 그대로 계승된다. 붓의 거침이 느껴지지만 차분하게 얹힌 듯한 색의 층위, 인물의 표정보다 오히려 흐르는 배경의 색조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 그리고 평면적 구조와 속 깊은 단어 선택이 이 작품의 독특한 무드를 완성한다. 장면 전환과 페이지 레이아웃에서도 흐름을 끊지 않는 선호와 섬세함이 엿보인다.
이 책이 지금의 독자에게 더욱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점점 더 외로워지고, 감각을 믿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화면의 빛에 에워싸인 아이와 어른 모두, 실제 촉감과 비언어적 온기를 필요로 한다. ‘찐빵이불’이 주는 사랑스러움과 부드러움은 단순한 회상이나 미화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이어나가는 미세한 애씀이며 연대다. 한 권의 그림책이 대체할 수 없는 감정의 공백을, 찐빵의 한 포근함으로 달랜다.
‘찐빵이불’을 열면, 나와 가족, 친구와 반려동물, 그리고 작은 온기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된다. 그리움, 그리움, 그리고 조금 느린 시간. 바쁜 세상 속에서 잊혀진 감각의 조각, 단순한 기쁨의 온기가 묵묵히 종이 위에 머문다. 이것이 이 책을 오늘, 이 계절에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이유다.
— 한도훈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