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얇은 소설] 설산을 보다

‘설산’이라는 이미지는 한국 문학에서 오래도록 차용되어 온 은유다. 그런만큼 그 단어가 다시금 소설의 갈피에 담길 때마다 새로움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조경란의 신작은 여기서 또 한 번 독자의 감각을 흔든다. 이번 소설은 거대한 존재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언어의 한계, 그리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삶의 자세로 시선을 돌린다. 눈앞에 펼쳐진 설산은 이질적인 아름다움과 동시에 두려움, 고립,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는 불안의 응결체다. 작가는 익숙한 풍경을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조명한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얇음’이라는 부사적 감각은 설산 자체를 두껍지 않은, 불안정하고 한없이 덧없는 존재로 재해석한다. 마치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무거운 감정조차도 실은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얇은 막처럼, 설산 또한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쓸려갈 것처럼 보인다.

조경란이 이번 작품에서 택하는 문체는 한층 절제되어 있다. 긴 여운의 문장보다는 순간의 기류에 집중한 짧고 압축적인 문장이 작품 전체를 타고 흐른다. 이는 소설 속 인물의 심리를 거세게 흔들기 보다는 잔잔한 흔들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올린다. 비단 주인공만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까지도, 모두 자신만의 ‘설산’을 바라본다. 누구에게나 삶에는 넘을 수 없을 듯한 거대한 벽이 존재하며, 그 정점에는 항상 한기가 흐른다. 문학에서 설산은 종종 극복해야 할 목표를 상징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설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바라봄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극복조차 불가능해보일 때,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 내면의 풍경을 바꿔가는지, 조경란의 섬세한 시선이 인물들을 따라간다.

2010년대 이후 ‘일상과 고립’의 감각을 부각시킨 소설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 즉 사회적 관계의 단절과 개인화된 감정의 내적 울림이 조경란의 이번 작품에서도 두드러진다. 한편, ‘설산을 보다’는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팬데믹 이후 서서히 변화하는 사회적 분위기, 누적된 긴장과 회복되지 않은 상실감까지도 설산이라는 풍경 안에 조밀하게 포개진다. 작가는 표면적으로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인간관계의 미묘한 결핍과 불안, 그리고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희망을 촘촘히 녹여낸다. 한기의 느낌, 보는 것이 곧 닿을 수 없는 경계임을 자각하는 순간이 반복될 때, 독자는 (비로소) 설산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몸에 느끼게’ 된다.

독자들이 잡아내는 이 절묘한 온도, 즉 차가움과 따뜻함이 교차하는 감정의 지점은 조경란 특유의 감성에서 비롯된다. 그녀가 오랜 기간 관찰해 온 인간 내면의 단면들—내면의 공허, 현실에서의 피로,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복합적 감정들—을 가벼운 손길로 찍어낸다. 언어가 얇아질 때, 그 사이로 슬며시 빛이 새어 나온다. 최근 국내 소설 경향은 ‘공감’과 ‘재현’에 치우친 반면, 조경란은 오히려 그 사이의 결락, 규정 불가능함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동시에 독자에게 감정 이전의 감각, 즉 ‘느낌’ 자체에 머무는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설산을 보다’의 텍스트와 다른 국내외 동시대 문학을 비교해보자. 일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처럼 풍경과 내면이 맞닿는 부분에서는 푸른 촉감을, 미국의 도나 타트 소설이 환기하는 깊고 어두운 밀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조경란은 그 사이, 얇고 투명한 유리창에 서서 풍경과 자아의 경계를 어떻게든 흔들어 본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직접적인 고백이나 분명한 설명 없이도, 독자와 작품이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머문다. 결과적으로 이용 가능한 언어의 한계를 시험하고, 풍경이라는 소재로 내면의 소음과 침묵을 동시에 들려준다.

문학은 종종, 독자가 끝내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은 순간을 마련한다. 현실의 문제들이 늘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듯, 조경란의 설산 또한 정확한 지도나 경로가 주어지지 않는다. 인물들은 각자 자기만의 걸음으로, 설산을 본다. 그리고 그 보기의 행위만으로도, 제대로 살아냈다는 위로를 얻는다. 한국 소설이 보여주는 최신 감각, 즉 ‘명백한 것이 아니라 애매한 것, 결코 닿을 수 없음이 주는 위안’과 맞닿아 있다.

지금 우리의 삶 또한 마치 설산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정하다. 하지만 얇다고 해서 반드시 무너지는 건 아니다. 얇음의 미학, 그 단단함이 이 텍스트 안에서 오히려 더 선연하게 빛난다. 조경란의 흔들림 없는 시선과 투명한 언어, 섬세한 풍경 묘사가 어울려 매우 조용한 침전과 위로를 선사한다. 설산을 보고 나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도 잠시 빛이 쏟아진다.

— 한도훈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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