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시간] K팝이라는 ‘이상한 나라’, 상품으로 소모되는 연습생의 삶 [플랫]

서울 성수동의 좁은 골목, 한 켠을 가득 메운 후드 트레이닝복 차림의 10대들이 몰입한 표정으로 오디션장 입구를 바라본다. 비가 내린 듯 반사판 위에 퍼지는 조명, 손에 쥔 핸드폰에는 걸그룹 데뷔를 꿈꾸는 친구들, 부모들의 긴장된 메시지가 끝없이 전달된다. 유리문 너머로 들려오는 빠른 EDM 비트, 혹독한 군무 소리 위로 걸쳐지는 관계자들의 짧은 외마디. 현장에선 ‘꿈’이라는 단어보다 ‘상품’이라는 무게가 빠르게 내려앉는다. 연습생 김소연(가명)의 한마디가 귓가에 남는다. “여기선 내가 춤을 못 추면, 그냥 교체되는 부품 같아요.”

2026년, K팝 시스템은 더 거대해지고 정밀해졌다. 그러나 외부에서 바라보는 화려한 조명과 대형 팬덤, 글로벌 성장의 그림자 뒤에는 연습생 신분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기획사 복도 벽은 무한 반복되는 생존 경쟁의 무대. ‘1년에 5000명 이상’ 쏟아진다는 연습생 중 실제로 데뷔하게 되는 이는 몇손가락에 불과하다. 수많은 기획사 매니저들, 안무가, 트레이너가 카메라와 마주하며 반복적으로 되묻는 질문이 있다. “이 아이, 시장성을 갖췄나?”

이상한 나라의 거울 저편, 그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날카롭다. 숙소와 연습실을 오가는 ‘합숙’ 생활은 마치 통제되고 설계된 콘베이어 벨트 위를 오가는 기계 팔을 닮았다. SNS 속 실시간 팬 관찰, 평가 점수 경쟁, 몸무게와 외모에 대한 극한의 기준, 그리고 ‘포기’를 강요하는 유령 같은 규칙들까지. 연습생 A는 “사람이 아니라 상품, 브랜드가 되려면 사람 냄새조차 지우라고요”라고 털어놓는다. 조명 너머로 보이지 않는 건 늘 이들의 이름이 아니라, 기획사이름, 트레이너 이름, 투자자의 눈빛이다.

근래, 연습생 경합 구조는 게임처럼 진화했다. 3개월 평가, 생방송 서바이벌, 유출되는 굳이 공개되지 않아도 될 ‘점수’ 영상, 탈락자를 먼저 발표하는 편집 기술. 공식 유튜브 채널에는 생존자, 탈락자, 잠정 보류자들의 표정이 같은 패턴으로 반복된다. 화면 밖, 기자의 카메라에도 남겨지는 건 속절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결연한 얼굴뿐이다. “실패해도 위로받을 틈이 없어요. 당장 내일 또 나가야 하니까요.” 한 출신 연습생의 말이 실감을 더한다.

이 모든 과정을 쫓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철저하게 효율성을 좇는다. 익명의 업계 관계자들은 “데뷔조 선발은 투자사의 ROI(투자수익률) 논리와 브랜딩이 8할”이라고 설명한다. 음악, 춤, 인간관계 레슨, 영상 촬영, 개인 SNS 관리까지. 모든 과정이 ‘브랜드 완성도’라는 값으로 환산된다. 실제로 국내외 기획사들은 유튜브 채널, 틱톡 릴스, 실시간 트위터 스페이스까지 연습생 단계에서부터 콘텐츠화를 당연시한다. 현장 영상 기자 입장에서도 연습생의 사생활과 노동, 소진 그리고 이탈의 순간이 거의 분 단위로 클립 영상으로 분할, 시장 가치를 위해 반복 소비되는 현장이 거듭 중계된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연습생 생활은 더 은밀했다. 하지만 2020년대에 접어들며 서바이벌 오디션, 리얼리티 방송, 라이브 스트리밍이라는 무대가 기본값이 됐다. Z세대 팬들은 연습생의 일상, 연습 과정, 고민까지 세세하게 관찰자의 시선으로 함께 호흡한다. 팬덤의 온도만큼 반작용도 거세다. 지난해 대형 기획사 데뷔 서바이벌에서 발생한 팬투표 조작 논란, 탈락자 SNS 비방, 합격자 대상 신상털이 등은 ‘꿈’의 껍질 뒤에 도사린 새로운 폭력의 면모를 드러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트레이너 B씨는 “두 달 만에 5kg 빠진 아이가 ‘인기가 없으면 군살도 필요 없다’는 말에 웃으며 버텼다”며 지친 듯 말끝을 흐렸다.

한 유명 연예기획사 이사는 “상품으로 만들어져야 경쟁력이 생긴다”고 잘라 말한다. 이 말에서 묘하게 뒤틀린 ‘현대판 이상한 나라’의 풍경이 떠오른다. 경제지 기자 출신인 한 평론가는 “연습생 시스템은 사실상 대량생산과 선택적 소비, 가격 경쟁력 논리의 집합체”라고 전한다. 한편에선 미성년자 노동 착취, 정신 건강,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지만 현장은 별다른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다.

이상적 꿈의 현장과 상품, 소비, 소진, 잊힘의 메커니즘이 혼재된 오늘. K팝 연습생의 삶은 감정과 땀이 느껴지는 ‘현재진행형 사건’으로 존재한다. 2026년 “이상한 나라”라 불리는 이 세계의 또 하나의 진실 — 꿈과 욕망, 그 이면에 감춰진 상품화 구조의 뒷면이, 오늘도 서울 어딘가에서 조명을 밝힌다. 현장에선 질문이 쌓인다. “누구를 위한 시스템인가? 그 속의 아이들은 정말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상은 무대 위 영광의 순간이 전부가 아니라, 꿈과 상품, 투자와 폐기 사이, 누가 잊히고, 누가 살아남는지 지난 10년간 기록한 수많은 카메라 렌즈가 포착하는 또 하나의 질문이다.

백하린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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