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세계는 평양의 시간대로 흘러가고 있다
가끔 우리는 시계 바늘의 끝이 끝내 멈춰버릴 것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세계는 평양의 시간대로 흘러가고 있다’라는 책의 제목은 그런 어떤 정적인 공포, 혹은 의외의 순응을 암시한다. 실제로 시곗바늘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도시들이 있다. 백야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직 한여름을 잊지 못하는 방콕, 그리고 전 세계와 단절된 채 자신만의 시간, 즉 평양 표준시에 살고 있는 북한. 이 책은 우리에게 도발적으로 묻는다. 시간은 흘러가는가, 혹은 휘각거리는가.
새벽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이 장편은 평양이라는 도시, 그곳의 사람들과 규율, 그리고 어색함까지도 은은하게 비추며 시작된다. 단순한 북한 안내서가 아니다. 작가는 고요한 시계탑 아래,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버둥거리는 현대인의 일상과 북한의 독특한 사회주의적 리듬을 교차시킨다. 실제로 북한의 시간제도는 정권의 상징적 자존심이다. 평양시에서 멈춰버린 듯한 버스, 정각이 되어야만 굴러가는 관료주의, 그리고 하늘로 흩어지는 인공기 아래 흐르는 느린 행렬. 저마다의 시간이란 실타래에 묶인 듯 느릿느릿 흘러간다.
지난 수년간 도서 시장에는 북한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출연했다. 사실 해석의 스펙트럼은 두텁다. ‘8월의 공산당원’처럼 냉소적이고도 비판적 시선을, 또는 ‘평양냉면, 국경을 넘다’처럼 음식으로 가늠하는 일상적 호기심을 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오히려 반박함으로써 존재한다. 북한을 ‘특이한 타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안의 시간조차 실은 권력과 규율, 변화의 의지와 충돌에 의해 언제든 흔들릴 수 있음을 뼈아프게 짚어낸다. 복잡한 국경을 사이에 둔 강 너머, 간헐적으로만 포착되는 환영과도 같은 ‘평양의 시간’. 이 시간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시간 안에 눈을 뜨고, 닫는다.
새로운 시각이란 결국, 기존의 의미망을 기꺼이 벌이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책은 내내 체념과 희망이 교차하는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스크린 바깥의 북한을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내면의 자기 고백이다. “당신은 어디쯤 서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시간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말이다. 이 책의 문장 어디를 집어 들어도 거기엔 고독한 생존의 결기와, 묵직하게 침잠하는 한숨, 그리고 이따금 불쑥 튀어나오는 소박한 유머가 깃들어 있다. 작가는 특별히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여백을 통해 경계 너머의 나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상적인 답답함마저도 뜨거운 명상으로, 혹은 느린 감상으로 바꿔놓는다.
최근 문학 시장 트렌드는 비정치적 시선의 활기와, 냉철하되 따뜻한 연대의 잠언들에 쏟아진다. ‘세계는 평양의 시간대로 흘러가고 있다’ 또한 그러한 흐름 위에 선다. 책장은 삐걱거리는 긴장감보단,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교차하는 문장들로 채워진다.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에 피로해진 독자들에게, 템포를 늦추며 자신과 세계를 관조하게 만든다. 아득한 국경 너머에서 온, 그러나 아주 가까운 ‘낯선 시간’이 2026년의 서울 독자에게 건네는 은유 쪽지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따금 멈춰서는 시계와, 그 앞에서 혼자 재깍재깍 시간을 세는 한 사람이다. 평양의 시간은 곧, 내면의 침묵이자 우리 모두의 고유한 걸음걸이. 언젠가 이 느리고 무뚝뚝한 리듬이 세계의 진동수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약간은 불안해지면서도 기묘한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토록 불완전한 시간의 세계 안에서, 매일 조금씩 서로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안에서 침묵하듯 공명하고 있을지도.
정다인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