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의 건강, 권리에서 시작하다

오전 내내 붉은 띠를 두른 사람들이 서울 한복판에 서 있다. 커다란 손팻말에는 뚜렷하게 찍힌 문구 하나, “건강하게 일할 권리 보장하라.” 2026년 9월 2일, 서울 도심 곳곳에서는 여러 직종의 노동자들이 모여,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단순히 임금이나 복지 차원의 요구가 아니라, 일하는 이들의 삶과 건강을 온전히 지켜 달라는 절박함을 들고 나왔다. 현장에서 만난 간호사 박은진 씨는 “이직을 고민하는 동료들이 너무 많아요. 야간엔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환자 돌보고, 건강검진조차 미뤄야 하는 현실이 답답해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건강하게 일할 권리는 오래되고도 가장 기본적인 사회 요구다. 하지만 현실은 그 요구가 생각보다 자주 무너진다. 산업재해뿐만 아니라 장시간 노동, 위험환경, 심리적 스트레스가 만연한 오늘, 맑고 정직한 일터는 일종의 특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사회 곳곳에서 느슨해진 안전망은, 다시 한 번 근로 환경과 노동자 건강권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최근 국립중앙의료원 통계에 따르면, 의료·돌봄 종사자의 36%가 건강문제로 일자리를 옮겼거나 쉬었다는 답을 했다. 코로나 시기가 지나도, 건강하게 일할 권리는 여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삶의 문제로 남아있다.

법률적으로 보면,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적 문구와 현장 사이의 간극이 크다. 정부와 각 사업장마다 위원회를 통해 산업안전 강화 방침을 내놓지만, 일터의 변화는 더딜 수밖에 없다.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감정노동자 보호법’(2024년 개정안)이 통과됐음에도, 서비스와 배달, 돌봄 노동자들은 여전히 위험을 감수하며 종종 건강을 내놓고 일하고 있다. 기자가 만난 청소노동자 김승철 씨는 “일하다 크게 다친 동료가 퇴직 이후에도 치료받기 힘들었어요. 산재 신청도 복잡하고, 아픈 몸보다 망가진 마음이 더 무섭다”라고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는 결코 한 개인의 불운이나 약점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내일을 바꾸기 위한 이야기에 가깝다.

“건강하게 일할 권리”는 외부에서 보기에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약속의 언어다. 누구나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 그 신뢰가 제도를 통해, 문화로 스며들지 못한다면 결국 사회 전체의 건강도 위협받는다. 청년 소방관 이호진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숨쉬듯 건강하게 일하고 싶어요. 아픈 동료를 볼 때마다 ‘내일이 내 차례일 수도 있다’는 생각뿐입니다.” 최근 논란이 된 구로디지털단지 야간 교대근무자 과로사 사건 역시 건강권 사각지대가 도심 곳곳에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근래 시민단체와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건강권 현실화’ 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이 운동은 단체협약 내 ‘실질적 건강권’을 보장하게 하는 조항 신설, 휴식 권리 명확화, 노동현장에 심리상담·건강관리 지원 확대 등을 촉구한다. 일부 진보적 기업과 기관은 적극적으로 정책을 도입해 건강 검진 주기를 짧게 하거나, 심리치료를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평택의 한 반도체 제조사에서는, 근로시간마다 10분간 스트레칭 타임을 도입하면서 현장 만족도가 크게 올랐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으려면,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제도 개선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자가 이후 추가 취재한 복지전문가 김정화 씨는 “사람이 건강할 권리가 권리답게 작동하려면, 책임 있는 국가와 책임지는 사업장, 그리고 자존감을 가지는 노동자 모두의 노력이 함께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사회적으로 볼 때, 건강하게 일할 권리는 단순히 개별 직장이나 산업군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일터의 건강은 가정의 평화, 지역사회의 활력, 나아가 국가경쟁력의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OECD 국가 대비 우리나라의 직업성 질환·사망률이 여전히 높다는 사실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경각심을 던지고 있다. 실제로 일터에서 고혈압·근골격계 질환·우울증 등 만성질환 발병률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돌봄노동, 감정노동, 야간노동 등 사각지대에서는 이 지표가 더 심화된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서도 2025년 기준 전체 근로자 중 48%가 ‘업무로 인한 신체적 혹은 심리적 위기’를 경험한 적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회 어딘가에는 ‘노동은 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남아 있다. 젊은 워킹맘 배지현 씨는 “일하다 아프면 무능하다는 소리 듣기 쉬워요. 상사도 그냥 참고하라고 하니까요. 쉴 권리, 말할 기회를 주면 좋겠어요.”라며 힘겹게 미소 지었다. 눈앞의 생산성과 실적, 성과지표에 갇혀있는 동안 놓치는 것들. 그 잃어버린 이야기를 되찾는 일, 이것이 오늘 건강하게 일할 권리 외침의 본질이다.

거창한 법 개정이나 또 하나의 대책위원회가 아니라, 현장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더 주의 깊게 듣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아이를 돌보는 보육교사, 식당에서 땀 흘리는 주방장, 야간을 지키는 경비원 모두가 건강하게 걸어서 집에 돌아갈 때까지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다. 필자는 오늘의 거리, 그 팻말과 울림을 잊지 않을 것이다. “건강하게 일할 권리 보장하라.” 그 한 문장이 서울을 울렸듯,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에도 울려 퍼지길 바라본다.

김민재 ([email protected])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